등록문화재 도입 10년... 근대 ‘보물창고’ 들여다보니





우리나라 국보 1호는? 숭례문(남대문). 보물 1호는? 흥인지문(동대문). 그럼 등록문화재 1호는?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전력 사옥이다.
등록문화재는 급속히 사라져가는 근대문화유산의 관리와 활용을 위해 문화재청이 2001년에 제정한 제도다.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 혹은 우리 세대에서도 본 적이 있는 아련한 추억의 물품들과 건물들이 등록돼 있다. 조국 광복을 맹세한 글이 빼곡한 태극기, 백범 김구 선생이 흉탄에 쓰러질 당시 입었던 혈의(血衣) 등 서럽고 질기게 이어온 우리 근대사의 고비고비를 보여주는 물품도 많다. 그래서 485건 등록문화재 하나하나가 근현대사의 보물창고요 이야기보따리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7시 상해 임시정부 청사. 김구 선생은 의거를 위해 홍구공원으로 떠나는 윤봉길 의사를 배웅했다. 윤 의사가 떠나기 직전 말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시계를 맞바꾼 백범은 목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고 인사한다.

거사 1시간 전 백범 시계와 맞바꿔
윤 의사의 의거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즉사하고, 일본군 주요 인사들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체돼 있던 독립운동은 활기를 찾았고, 중국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원했다. 이렇게 윤 의사의 정열과 애국심, 김구 선생과 나누었던 굳센 믿음이 그들이 교환한 회중시계에 담겨 있다.그런데 윤 의사의 손녀 윤주영(52)씨는 이 시계에 남모르는 의미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윤씨는 그녀의 할머니(고(故) 배용순 여사·윤 의사의 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해방 직후 백범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윤 의사의 생가를 찾아 윤 의사의 어머니(고(故) 김원상 여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윤 의사와 맞바꾼 시계를 보여드리며 “아드님께서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아드님 덕분에 광복이 이렇게 빨리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아들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아들을 사지(死地)로 내몬 백범이 원망스럽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백범은 깊게 탄식하고 회중시계를 도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서거하는 날까지 그 시계를 항상 곁에 두었다. 백범의 회중시계에는 아들을 나라에 바친 어머니의 아픔과 그것을 지켜보는 백범의 미안함이 함께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441호인 이 시계는 서울 백범기념관에 보관되어 있고 윤 의사가 백범에게서 받았던 시계는 보물 제568호로 지정돼 윤 의사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충남 예산군 충의사에 전시돼 있다. 이 시계들은 2006년 백범 탄신 130주년 기념 특별전 때 한 번 만났던 적이 있다. 이후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박희명 백범기념관 학예연구사는 “백범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두 분이 시계를 교환하며 나눴던 그 마음을 전달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백 마디 설명보다 두 분의 대화를 그대로 한 번 읽어 드리는 것이 더 효과가 큰 것 같다”고 말했다.조선에 서양의학을 처음으로 전파한 의사 겸 선교사 알렌(H. N. Allen·1858~1932)은 당시 안과계의 ‘얼리어답터’였다. 연세대 의과대학 김찬윤 교수는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기 안과기기 연표와 알렌의 수술 기록을 대조해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며 “알렌은 세계적으로 볼 때도 가장 앞선 안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의사였던 것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등록문화재 제446호로 등록된 알렌의 검안경(눈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든 기구)에 더 큰 역사적·의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다. 당시 알렌은 이 검안경을 활용해 백내장 수술을 하는 등 조선에 일찍이 없었던 의료 활동을 벌였다.

알렌의 검안경은 1985년 5월 연세대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된 알렌의 후손들이 학교에 기증했다. 미국에 건너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등 여러 사건들로 인한 훼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알렌의 검안경이 전시된 연세대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의 박형우 관장은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출처를 알 수 있는 의학 관련 자료가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많이 분실되고 훼손됐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검안경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꼬리표’가 확실한 몇 안 되는 자료 중 하나인데다 보관 상태가 매우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 속 열어 고치니 시계 속도 고쳐 달라”
알렌은 갑신정변 때 심각한 부상을 입은 민영익(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을 치료해 당시 서양 의술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꿔 놨다. 박 관장은 “기록을 보면 알렌에게 고장 난 시계를 가져와 고쳐달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도 속을 열어 고치는데 시계는 당연히 고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는 것이다. 알렌의 외과 수술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기하게 비춰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박 관장은 이어 “이 검안경을 활용해 시술했던 백내장 수술도 지금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의 수술이었지만 당시엔 심 봉사가 눈 뜨는 것처럼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러한 몇 차례의 수술을 통해 조선 왕실과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은 알렌은 조선에 선교활동을 하면서 의술도 함께 전파하고 싶어했다”고 덧붙였다.

김찬윤 교수는 “알렌의 백내장 수술 기록을 보면 수정체를 혼탁하게 만드는 물질이 액체면 빨아내고, 고체면 치워버렸다고 나와 있다. 지금의 수술과 원리는 다르지만 확실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금도 쉽지 않은 그 수술을 한 세기 전에 했던 것이다. 이 검안경의 기능이 완벽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근대 의학사에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유선의 기자 sunnyy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