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6

 

이 성전을 헐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6,19)

 

  

사망에서 생명으로를 소유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썩지 않을 씨로 다시 때어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우리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3:16). 진정 우리는 우리의 몸,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으로 충만히 채워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이 없고, 십자가 앞에 서면, 여전히 두렵고 떨립니다. 언제까지 저 십자가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보게 하는 상징에 머물러야 할까요? 저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신 상징이요, 모든 죽음이 끝나는 자리가 아닙니까? 바로 저 십자가 위에 죄와 허물로 얼룩진 우리 자신이 매달려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부활의 영을 누릴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말씀이 요한복음 2 13-22절이 아닐까 합니다.

 

장사꾼들이 득실대고, 혼잡함으로 가득 찬 성전의 뜰은 우리네의 마음속이요, 우리의 삶일 것 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귀한 은혜와 사랑을 수도 없이 세상의 논리와 풍조에 팔아 넘겨온 우리의 지난날 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할 것은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라 하십니다. ‘도 되고, ‘아니오도 된다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할 것을 아니오하고, ‘아니오할 것은 하며, ‘도 아니고, ‘아니오도 아닌 신앙인으로 살아왔는지요. 또한, 주님은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하셨습니다. 준엄한 명령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한 근심과 염려는 다 무엇 입니까? 한쪽 발은 교회에 두고, 다른 한쪽 발은 세상에 걸쳐 놓은 우리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지요. 다만 준엄한 명령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또한 해법일 것입니다. “여기서 가져가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주시지 않은 마음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옮겨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거나, 감당하지 못할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겠습니다.

 

장갑은 손을 넣기 위해 만듭니다. 모양은 사람의 손이지만, 손에 끼워지지 않으면 장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한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것 입니다. 우리가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분이 내주하는 자리이며, 그분과 만나는 자리이고, 그분과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정결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우라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주님께서 우리의 삶과 신앙을 다시 세워주시는 사순절 참회의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