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싶은 목회자] (3)


대전남부교회 박요한 목사 (아름다운 퇴장, 아름다운 목사)

아름다운 삶을 산 자만이

아름답게 떠날 수 있겠죠.

자신의 살과 피와 같은 교회를 아름답게 은퇴한 목사들의 이야기..

그들의 "아름다운 퇴장", 그 거룩한 자기비움은

그걸 가능하게 한, 그때까지의 삶 자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어었을 겁니다.

여기선 바로 그 목사님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죠.



이 분은 자신이 20년간 목회했던 대전남부교회를

1986년 70세로 은퇴하면서, 당시 막 목회현장에 뛰어든 아들을 마다하고, 다른 후임에게 깨끗하게 교회를 일임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1972년에, 김창인 목사 다음으로 예장합동 총회장을 지낸 바 있는데요. 교회도 당시 500명 정도 출석하는 아주 안정적인 교회였습니다. 교단과 교회 내에서 박요한 목사가 지니고 있던 지위와 신망에 비춰보면, 박요한 목사는 자신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아들인 박정식 목사를 교회 후임으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요한 목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 아들 박정식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대전에 개척하려 하는 것마저도 막았습니다. 대전남부교회 후임 목회에 혹이나 누를 끼칠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지요.

박요한 목사는 은퇴 후 바로 거처를 대전에서 성남으로 옮겼습니다. 후임목사가 자신의 목회를 부담없이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는데, 사실 자신이 20년간 섬겨 가꿔온 교회를 그렇게 훌훌 떠난다는 게 어디 쉬웠겠습니까.. 박요한 목사가 교회를 떠날 당시 처음으로 그렇게 울었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눈시울이 뜨거워지시더군요.

결국 물러남이라는 것은 사실 떠남이고 헤어짐인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이었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게 후임목사와 교회를 정말 위한 길이고, 이건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마음 먹었던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아까 아들 박정식 목사 얘길 잠깐 했었는데,

그 얘길 좀 더 했으면 합니다. 현재 박정식 목사는 서울 상계동 한 상가건물 4층에서 "섬기는 교회"라는 아주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내가 찾아갔을 때, 그 교회는 정말 겉으로 보기엔 많이 왜소해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상가건물 꼭대기에서 쉽지 않은 목회를 하고 있는 이런 아들을 박요한 목사는 뜻밖에 몹시 흡족해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박정식 목사의 목회방침과 철학에 있었습니다. 박정식 목사의 "섬기는 교회"는 정말 일반 교회와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회식도 꽃꽂이도 없고, 재정의 30%는 구제와 선교에만 쓰고 있는 교회였죠. 박요한 목사는, 아들이 더 큰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재목이고, 처음 대전에서 교회를 시작했다면 환경은 더 좋았을 거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저만~하면, 저만~하면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겠느냐며 웃으셨습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은 퇴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퇴장은, 또 아름다운 시작을 낳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박요한 목사는 연로한 중에도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흑산도가 고향인 박요한 목사는 교회를 은퇴하기 5년전부터 섬을 다니면서 구제와 선교활동을 다니기 시작했고, 은퇴 후에는 더 본격적으로 섬 선교에 투신해서 지금까지 20년간 평균 한해 100개의 섬을 다니고 있었다.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 454개 섬 가운데 교회가 하나도 없는 173개 무교회 섬을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고, 이를 위해 지금도 1주일에 반은 집을 비우고 계셨다.

지금 85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자신의 피와 살과 같은 담임 교회를 완전히 떠나 한국교회의 사각지대를 돌보기 위해 낙도 선교라는 제2의 목회 인생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운 물러남이 다시 아름다운 나아감을 낳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을 만한 그런 길 아니겠습니까?

크리스천 > 컬럼 > 이진성의 세상읽기에

아트란트 에서 이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