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 것은 가이사에,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가난한 자들에 직접 건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찬받을 것

관련 성구: 마태복음 22: 21, 마가복음 12: 17, 누가복음 20: 25


성도들의 헌금, 예배 때에는 하나님의 소유이나 예배 후는 사람들의 소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지만, 가이사 나라에서는 물질이 있는 곳에 타락과 부패가 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의 수중에 떨어지는지 사람에 가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한다. 만일 그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봉헌하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내가 드린 헌금이 예배 때에는 하나님의 돈이 되었는데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의 수중으로 떨어진다면 계속 헌금을 내야만 할까? 예배 때 하나님께 봉헌기도만 하면 물질의 향이 올라가 과연 하나님은 돈 냄새만 맡고 실제 사용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은 창세 이후 지금까지 먹지도 못하고 냄새만 맡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학은 꾸준히 교회의 주인도 헌금의 주인도, 제사의 주인도 하나님이라고 언급해 왔다. 그러면 어떤 돈이 하나님의 돈이고 인간의 돈인지, 즉 가이사의 것은 어떤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어떤 것인지 구별기준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주인이라면 하나님은 그 돈을 어떻게 가져가고 어떻게 관리할까? 아니면 혹시 사람들이 기만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가져가니까 말이다. 향은 하나님에게로, 사용은 인간에게로 아닌가?

실제로 등기부등본을 떼어 보거나 은행 통장을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분은 냄새만 맡았지 소유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 모두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현실의 주인은 사람이다. 돈과 건물을 사용하고 매매할 수 있는 사람이 실제 주인이다. 등기부 등본과 통장에 이름이 적혀 있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단지 형이상학적 주인이다. 교회에서는 헌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계속 외치면서 결국 인간들이 인간이 만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구약시대에서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고 나면 고기를 서로 나눠 먹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향은 하나님이 흠향하고, 고기는 인간의 것이 되는 것이다. 현대에서도 봉헌기도의 향은 하나님께 올라가고, 물질은 인간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사람의 것이니 마음대로 먹고 뜯고, 사이 좋게 나눠가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제의는 결국 타성에 젖고 타락했다. 해서 하나님은 고기 냄새도 싫다고 짜증을 내셨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고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했다. (호 6:6) 제사를 드린 태도나 드린 후의 행위에 하나님은 진저리를 치신 것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드릴 때는 정성스레 드리지만 제사만 끝나면 인위적으로 서로 사용하는데 정신이 없다. 작은 교회라면 목회자 사례비로 60~70% 건네 가고, 나머지는 20%는 교회 운영비, 구제비는 10%도 안 된다. 대교회이면 목회자 사례비는 1억 연봉을 상회하고, 고급아파트와 승용차, 건축, 기도원부지 매입, 선교 명목의 해외출장, 과시성 박사학위 비용, 해외 신학교에서 졸업비용, 100만원을 넘는 설교 스피치 훈련비 등 어마어마한 돈이 개인을 위해서거나 비 신앙적인 요소로 사용된다.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필자가 다니고 있는 신학교와 자매를 맺은 신학교가 있는데, 한인 목회자들이 들리지 않는 영어로 1주 만 미국에서 공부하는데 비행기 비까지 포함하여 개인당, 1000만원이 들고, 졸업할 때 1000만 원해서 2000만 원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인당 졸업할 때까지, 한국학교는 고사하고서라도 과시성 박사학위 하나를 위해서 미국에만 뿌리는 돈이 2000만 원 정도 이다. 단지 2번만 왔다 가는데 드는 비용이다. 이 돈은 어디서 났을까?


헌금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당회나 목회자

한국교회에서 헌금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헌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당회이거나 목회자였다. 당회는 목회자의 명예성 박사학위비용과 외국 비행기 비용까지 대주어야 했다. 한국교회의 당회는 재정 감시 기관이면서 재정집행까지 도맡아 왔고 목회자는 피고용인이면서도 고용인처럼 행세해왔다. 자신이 개척해서 성장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 되는 교회가 아니라 입김이 압도적으로 강한 목회자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재산은 하나님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삭개오 처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바치겠다고 말하기까지 예수님도 삭개오의 재산에 손을 못 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때까지 삭개오의 재산의 주인은 삭개오이지 예수님이 아닌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바친다고 결정했을 때는 이미 하나님의 재산이 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재산을 바치고도 봉변을 당한 것은 이미 재산을 바치기로 결정을 해서 하나님의 재산이 되었는데, 중간에 다른 마음을 품어 일부를 자신의 재산으로 환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친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돈이 하나님의 돈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눈먼 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갖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위적인 방편을 우선시 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 돈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가이사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특정 가이사 사람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즉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목회자의 고액 연봉, 호화 승용차, 빈번한 외국출타, 과도한 판공비, 맘모스적 성전건축, 기도원부지 확보 등은 가이사 나라에서나 필요한 것이다.


헌금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그 분의 정신과 뜻대로 사용해야

그러나 헌금의 주인이 하나님인 나라는 성직자의 청빈한 생활을 위해서 기본적인 생활비와 빈자들의 생활비를 지출하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라면 성경을 통해서 알려진 그 분의 뜻과 정신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드리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사용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하나님은 예배 이후까지도 주인으로 행세하기 때문에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 계속 감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헌금의 주인이 끝까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그 돈은 일반세상에서 사용하는 돈과는 달리, 보다 선하고 성스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스런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거나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더 이상 그 돈은 하나님의 돈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돈은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없고, 사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순간 이미 그 돈은 하나님의 수중에서 떠나 인간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다. 면죄부를 위해서 바친 헌금은 사람들의 헌금이었지 하나님은 그런 돈을 결코 소유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도들의 허락 없이 당회나 거인 목회자 등 소수 사람들이 재정을 마음대로 집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당회는 재정만을 감독하기로 되어있는데 집행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구제비가 10%를 넘지 않는다. 헌금의 70~90% 이상을 자체 교회 운영비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돈의 주인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사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헌금을 내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의무이니 안 바치면 심판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 내야 하는가? 일단 결론부터 내리면, 가이사 나라 확장공사비로 사용된다면 헌금은 특정교회에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분은 북한 선교하라고 땅을 팔아 바쳤더니 담당 목회자가 그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해놓았다고 한다. 이런 목회자가 있는 데는 헌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헌금이라면 바칠 때와 사용할 때가 투명하고, 사전 집행과 사후 보고가 투명하며 하나님의 영감인 성경에 부합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의 헌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돈을 하나님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사지 한 장이라도 아껴 쓰는 것이다.

따라서 가이사 나라 확장을 위한 인위적인 모습으로 헌금이 유용될 때는 그 교회에 헌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 돈이 있다는 것은 계속 타락을 부채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목회자와 교회의 문제는 돈이 너무 많아서 문제이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겠는가? 김성국 선교사도 돈이 없었다면 골프장 얘기도 안 나오고, 성적인 범죄도 힘들었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한테 성욕은 우러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인제사장적인 헌금 필요할 때

개신교는 특정 사제를 통해서 기도가 하늘에 올라가지 않고 직접 기도를 드리는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한다. 헌금도 마찬가지이다. 특정교회를 통해서만 자신의 헌금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컵 대접하는 것이 곧 예수께 대접하는 것이라 했다. 자신의 십일조가 죽어가는 북한 어린아이를 살리는데 한 몫 한다면 곧 예수께는 대접하는 냉수 한 컵이나 옥합의 향유 이상 되는 것이 아닐까? 삭개오도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절반 내놓겠다고 하니, 예수님께로부터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유대 성전에 내놓아 보았자 제사장들이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다 가져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특정 공간이나 공동체에 너무 구속하지 말고 만인제사장적인 기도뿐 아니라 만인제사장적인 헌금도 필요할 때이다.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직접 드린 헌금도 주님이 받는다는 말이다. 교회공동체라는 루트만을 통해서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공동체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헌금을 지출하고 사용처가 분명하며 인간의 욕망이나 탐욕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를 통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하고 적법한 절차를 이용하여 헌금을 강탈해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특히 부흥회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부흥회 참여시 일방적인 강요의 헌금은 안내는 것이 좋다.

오늘날 부흥강사를 통한 재정의 폐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성도들한테는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려야 복을 많이 주신다고 감언이설을 하면서 결국 가져가는 것은 자신들이다. 일부 부흥강사들은 60:40, 70:30하면서 서로 교회 측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초청해서 부흥회를 하기도 하여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 능력이 나타나지도 않는 안수를 남용해가면서까지 말이다. 일부 부흥사들은 총 헌금의 30% 또는 40%를 가져가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기도원이 텅텅 비는 것이다. 강대상에서는 하나님께 바쳐야 많은 복을 얻는다고 하면서, 강대상 뒤에서는 자신이 몰래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마르크스가 왜 공산주의를 시작한 원인도 모르고 계속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려야 복을 받는다고 성도들의 이성과 정신, 영혼을 아편처럼 마취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기도원 집회를 가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헌금은 가이사인이 아니라 가디안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되어야

헌금은 헬라어로 '로기온'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헌금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인 가디안(Godian)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고 에클레시안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수단이자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헌금은 내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사용하는 용처도 중요한 것이다. 가이사 사람을 위해 사용되었느냐, 가디안을 위해 사용되었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을까봐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성도들은 자신들이 낸 돈이 가이사인들을 위해 사용되는지 가디안들을 위해 사용되는지를 냉정하게 되물어 헌금의 용처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이다. 사용처가 가이사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될 때, 과연 그 특수공동체에 헌금 내는 것이 타당하고 성서적인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하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 공동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건물이 아니라 에클레시안(교인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의 헌금은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회복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도처에 깔려 신음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헌금이 성직자의 타락을 부채질하거나 가이사 나라 사람들의 탐욕을 위해서 사용된다면 그 특정한 교회에 낼 필요 없고 차라리 투명한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때까지 북한 아이들을 돕거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과연 예수라면 어떤 헌금을 더 기뻐하실까? 특정교회에서 헌금이 인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동안 힘없고 가난한 소자들은 지금도 시원한 한 컵의 냉수를 기다리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황규학 / 교회법률상담소장, 에클레시안뉴스 대표
서울대 종교학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1997년 목사안수를 받은 황 목사는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플로리다신학교에서 ‘교회법’ 연구로 2004년 6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News & Joy
2006년 04월 04일 14:3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