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글(김태일 김효식집사)
 
 글을 쓰는 것조차 미안함에 머뭇거리다 이렇게라도 안녕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글을 드립니다.
저와 두 집사님 가정과는 40여 년 전 한 개척교회를 같이하면서 부터 인연을 쌓아왔습니다,
또 가나안교회에서 다시 만나자 좋은 믿음의 형제가 되어 왔습니다. 
그 어느 날 이현진, 안동순 장로님 등과 같이 멕시코선교 활동상황을 말하든 중 특별 선교자금 필요성을 논의 하였습니다
당시 선교지중 가장 가난하였든 곳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선교지는 중국 발행 문흥일보 1905년 6월자 기사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이곳 돼지고기 값은 80전(1pound) 하는데 한인 노동자 한사람 하루 품값은 30전 하니 너무 처참하다 모두가 조각조각 다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었으니 이곳 마야인 들이 보고 비웃는 소리는 참아 듣기 거북하다, 남자들은 연일 10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여러 농장에 흩어져 일하며 부인들이 아이들을 등에 업거나 팔에 안고 길가를 서성거리는 모습 등은 소나 말 짐승들의 생활을 보는 것 같아 보는 사람들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이고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때리어 피가 낭자하니 차마 볼 수 없으며 통탄하리다. 지치고 못 견디어 더러는 탈출하다가 잡히면 감옥에 갇혀 며칠씩 굶긴다.”
이상과 같이 문흥일보는 조선인들이 1905년 4월4일(이조 말) 1033명이 직업을 찾아 인천항을 출발 41일 만에 멕시코 유카탄 애나켄 농장에 가서 이민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 후손들이 현재에도 유카탄에만 약 6000여명 살고 있으나 개중에는 아직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러기에 지난날 우리 선교 팀은 더욱 열심을 다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곳에 우리 선교지가 있습니다. 산호새 오리에트교회입니다 주민들의 생활 모습은“ 출입문 창문이 없는 초가 단칸 움막집, 그 안으로 들어가면 부엌 침실 등의 전체 생활공간으로 가족 수에 따라 햄막(침대)을 치고 잠을 자며 낮에는 한쪽에 치워놓고서 살아가며 그 공간에 닭. 돼지. 개 등도 수시로 왕래한다. 물론 화장실은 없다. 직장은 구할 수 없으며 조그만 밭에 옥수수를 심어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교회 성도가정의 기본 생활 터전을 기도 중에 “그라민 BANK”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지식인 무함마드 유느스(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분이 약 40년 전에 자기 고향 최빈곤층에게 무담보로 한 가정 15달러를 융자해 주어 생활의 바탕을 마련하여 주기 위하여 그라민 BANK을 설립 가난을 구제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서 착안한 것이 명칭상 "생활향상 융자금”이었습니다.
즉 이 교회 가정의 빈곤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이 방법을 말하였을 때 김 집사님은 소장한 동양화 전부를 헌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교회 바자회에 소장품을 출품 수익금 전액 3000불을 헌금하시었습니다.
 김 집사님은 2002년 우리 선교 팀과 동행 그 교회 한 가정에 300불을 무담보 3년 기한 10가정에 융자하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자금으로  돼지. 양, 송아지. 양봉 기르기, 햄막 짜기 등으로 성공적인 삶음을 유지하며 교회에도 봉사 하게 되었습니다,(당시 송아지 한마리 시세 300불 미만)
기적과 같은 진실이었습니다. 순간적인 그 결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김태일 집사님 그리고 김효식 집사님 ! 
보고 싶습니다. 비록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불러봅니다.
매 주일마다 뜨겁게 나누든 정든 그 악수 !! 두 분께서 앉아 예배드리든 그 앞자리가 그립 습니다. 
우리 다시 그곳에서 만나요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소서
 2015년10월22일                               박춘원 가족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