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과 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는 초인적인 용서를 실천해 목사님을 생각할 때 마다 우리를 숙연케 한다.

이렇게 용서를 외치면서도 한국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결코 용서해 주자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하나 있다. 식민통치와 관련한 일본의 행실이다. 일본은 36년 동안 한국을 식민지배 하면서 몹쓸 짓을 많이 했다. 특히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해서는 보상은 커녕 책임을 아직도 인정치 않아 온 세계가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아울러 2차대전 전범의 위패를 보관하는 신사에 때 마다 수상이 가서 참배를 하는 것을 보고 한국을 비롯한 피해국들은 일본의 반성이 없다며 비난하기를 참지  않는다.

일본을 용서하자고 기도하거나 설교하는 목사 봤는가? 우리도 마음으로는 모두 간음죄를 짓는 부족한 인간들이니 정신대 할머니 문제도 모두 덮고 일본을 용서해 주자고 주장하는 사람 봤는가? 모든 한국 교인은 일본 사람보다 훌륭해서 일본인 쯤은 비판하고 용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가?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보고 빈정거리듯 하는 말이 있다. 한국 사람은 일본은 싫어하는데 일제는 좋아한단다. 부끄럽지만 맞는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 개인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성실하고 정직하다고 부러워하기 까지 한다. 거기에다 자동차를 비롯해 일본제 물건이라면 특히 한국 사람들은 사족을 못 쓴다. 그러면서도 아직 일본이 한 짓은 용서를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이 용서를 구하지 않아서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사람들은 독일을 용서했다. 왜냐하면 독일은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 철저히 용서를 구하고 상응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이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죄사함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지만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의 용서를 구하는 자만 그 혜택을 입을 수 있다. "나는 죄인이 아니로소이다"라고 말하는 이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이사야1:18)"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와서 변론하지 않는 죄인의 죄는 씻어 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잘 알듯이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모든 것 제쳐두고 이목사가 교회문제에 대해 담임목사로서 어떤 모양으로든 책임이 있으니 유감을 표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화를 하자는데도 거부하고 비난만 해 왔다면 우리는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생 박수 받기를 피하고 무대 뒤에 숨어서 고생만 했는데, 이제는 뻔뻔스러운 자들이 던지는 돌세례를 맞고 있다는 목사를 누가 어떤 재주로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못이 있다고 해야 용서가 될 것인데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니 어떻게 용서가 가능한가 말이다.

판단하지 말아라, 너는 깨끗하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흠이 많고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죄인인데 무슨 자격으로 잘못을 바로 잡겠다고 나서느냐? 라는 얘기는 대단히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옳음과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능력을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사용하라고 명하셨다.(로마서12:2) 사도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어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은 것이 아니다.

문제는 사랑이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을 때에도 사랑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대단히 두렵게 생각해야 할 점이다. 사실 이목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가장 고민하던 것도 비판은 하되 어떻게 사랑을 놓지 않은 상태에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말로 미움을 가지고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용삼 목사가 지금이라도 문제를 인식하고 용퇴를 결심하면 그에 대한 존경을 회복하고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아마 그 앞에 꿇어 앉아 눈물로 큰 절을 올릴 사람도 있지 싶다. 그만큼 아직도 이목사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을 용서해 주고 싶다. 어쩌면 그래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가나안교회 문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