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신 (崔容信) 전도사
  상록수 (심훈 소설)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1909∼1935년)  짧은 26년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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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아이들 교육 몸바친 ‘상록수’ 주인공
http://www.alltha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8

YWCA....아름다운 상록수- 최명신 전도사를 그리며
http://www.ywca.or.kr/home/info/webzine/0509/sub40.asp
          
  순복음...샘골교회-상록수 최용신 전도사 자취 가득
http://www.fgnews.co.kr/html/2006/0623/06062319114912140000.htm

조선일보..다시읽는 여인열전] (10)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205/200205220225.html

“아버지여, 당신이 보내신 귀한 따님을 왜 어느새 부르려 하십니까? 그 누이는 무식한 저희들을 위해 뼈가
깎이도록 일을 했습니다. 육신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는 그 시각까지 불쌍한 조선의 자녀들을
위해서 걱정을 했습니다. 주여! 그는 열매도 맺어보지 못한 순결한 처녀입니다. 다만 당신 한 분을
의지하고 동족을 사랑해 몸을 바쳤습니다.”(소설 〈상록수〉에서)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 지하철 4호선 상록수역.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딴 역명이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일제 때 시골이던 이곳에서 봉사하다 간 최용신(1909~35)이 모델이다. 이제 아파트촌으로
둘러싸인 샘골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향해 가니 상록수공원이다. 샘골교회 뒤쪽 공원엔 최용신 기념관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봄빛이 완연한 상록수들 사이에서 최용신을 앞에 두고 눈물로 기도하는
학부모들과 “우리 선생님을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공원 한쪽엔 최용신의 묘가 있다. 그런데 처녀로 죽은 그의 묘 옆엔 마치 부부인양 ‘김학준의 묘’가 있다.
김학준은 최용신의 원산 고향 뒷집에 살았다.
열여섯살에 약혼한 이들은 10년 뒤 결혼해 함께 못 배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기로 약속했다. ‘10년’을 몇달 앞두고 도쿄대 법대 재학 중 부음을 들은 김학준은 귀국해
자주 이곳을 찾았고, 최용신이 만든 천곡학원 이사장까지 지냈다.
그는 70년대 세상을 하직할 때 ‘최용신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족들은 교회에 땅 1천여평을 기증하고, 김학준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못다한 사랑’을 위해 뼈가 되어서나마 곁에 누운 묘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조선의 희망없는 이들을
깨우치라는 소명 깨닫고
낮엔 교회에 연 학교에서
밤엔 마을 돌며 헌신적 교육
아이들 이름 부르며 죽음 맞이

원산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최용신은 선교사가 운영하는 루시여자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의 감리교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식민지 백성의 우민화를 위해 신규 학교 설립을 차단하고, 기존의
민족학교마저 폐쇄하는 일제로 인해 당시 중고등교육을 받는 이들은 특혜 받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과
다름없이 그때도 넘어진 자를 일으켜줄 틈이 있으면 남이 따라올 수 없게 더 내달려야 한다는 게 배운
자들의 모습이었지만, 최용신은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며 일신의 영달만
도모한다면 저 버림 받은 농촌 아이들의 까막눈은 누가 뜨게 해줄 것이냐”고 했다. 하나님과 시대가 자신을
앞서 배우게 한 것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들을 깨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최용신은 또 신학교에서 비밀항일단체인 송죽회와 애국부인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황에스더
선생을 만나 선구자적인 소명을 다시금 확신하고 3학년 때 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후원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유교적 분위기의 시골에서 외지 처녀를 반겨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이 고장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주 염석주의 집을 찾아갔다. “농사를 지으면 1년
먹을 수확을 얻는데, 사람을 가르치면 백년치 수확을 얻는다”는 처녀의 당찬 말에 염석주는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돕던 아이들에게 헛바람이나 들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그를 경원시하던 마을
사람들도 한 명 두 명 아이들을 교회에 모아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가르치고 돌보는 최용신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최용신은 낮 시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엔 주부들을 모아 가르치고,
수업이 끝나면 이웃마을로 가서 다시 사람들을 가르치고 새벽이면 돌아왔다. 그러고선 하루도 빼지 않고
새벽 기도로 하루를 열었다. 그리고 방학 때면 인근 시골교회를 순회하며 주간단위 교육을 했다. 초인적인
헌신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 학교를 세울 때 노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나와 함께 학교를 지었다.
그야말로 일심동체였다.

이렇게 2년5개월이 지났다. 최용신은 공부를 중도에 포기한 자신의 지식을 더 길러야 함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그러나 채 3개월도 안 돼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가 병에 걸려 고국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샘골 사람들은
“누워 있어도 좋으니 제발 우리 마을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고, 최용신도
“죽더라도 샘골에서 죽자”며 돌아왔다. 그는 헐벗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 다시 교사로, 마을 지도자로,
때론 상담자로 헌신하던 중 병이 도졌다. 영양실조로 창자가 꼬여 썩어가는 병이었다. 최용신은
“이 학교만은 여러분의 손으로 살려가라”고 유언한 뒤, 그토록 사랑하던 아이들의 이름을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한명씩 한명씩 불렀다.

  한결래 조연현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