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36

 

슬픔을 벗는 길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예레미야 15:10)

 

     

           사람이 못할 일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저주하며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한 금지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 23:22). 그런데도 예언자는 오늘 성경처럼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온통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로 둘러싸여 있기에 이런 망언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원수들, 박해하는 자들에게 보복해 주십사 간청합니다. 여기에 더해 믿는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섭니다.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 15:18). 예언자는 이렇게 자신의 어머니를 넘어 하나님에게까지 분노에 가까운 격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신비주의 우화 중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은 천국 문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가게 된답니다. ‘슬픔의 나무라고 불리는 그 나무에는 사람들이 땅에서 겪은 온갖 슬픈 이야기들이 가지마다 달려있다고 합니다. 막 도착한 그도 자신의 슬픔을 적어 가지게 걸어 놓은 뒤,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거기 걸려있는 사연들을 일게 됩니다. 마지막에 천가가 묻습니다. 어떤 사연을 택해 다름 생을 살고 싶은지 말입니다. 덜 슬퍼 보이는 사연을 택한다면, 그렇게 보장하리라는 약속과 함께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그 이야기의 결말에 의하면, 어떤 영혼이든 결국에는 자신이 살았던 삶을 선택하더라고 합니다. ‘슬픔의 나무에 적혀 있는 이야기들을 알고 나면, 자신의 삶이 가장 덜 슬프고 또 덜 고통스러웠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슬픔은 이웃을 보며 내 처지를 헤아릴 때 뜻밖에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해소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웃의 아픔과 슬픔이 치유의 소재가 됩니다. 정말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슬픔이 해소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 15:20). 바로 이 말씀의 주인만이 우리를 탄식에서 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