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교회 웹 사이트에 올려진 ‘임시노회 참관기’ 중 일부(청색 글씨)를 옮기고 그에 대한 생각을 씁니다.

한 장로의 발언을 들으면서 마음이 더욱 찹찹했다. 아니 행정전권위원이라면 당회를 접수한다는 말인데 교회가 접수 당하는데 어쩜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장로다운 생각과 답은 전혀 없고 그 많은 대의원 다른 교회의 장로 목사님 앞에서 또 다시 목사의 험담을 늘어 놓는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서 누구 때문입니다, 원망 불평하는 모습 생각해 보라. 솔로몬의 재판이 생각난다. 정말 자기 자식이 아닌 엄마는 아기가 죽던 살던 관계 없다. 반이라도 자르시요다. 아이에 대한 애정은 전무했던 것이다.

가령 “여기까지 왔지만 노회원님들 우리 다시 한번 더 노력할 터이니 행정전권위를 다음 회기 때 해 주십시요” 하는 등 정말 고소 아닌 청원을 했다면 노회원들이 길이라도 열어 주었을 터인데 이곳까지 와서 목사 험담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겠는가? 기권한 몇 명 (아마 가나안 교회 대표들) 외 거의 전원이 행정전권위원회 구성을 찬성해 버린 것이다. 마음 아픈일이다.

행정전권위의 역할은 본 교회 당회를 대신한다. 이용삼 목사는 교회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간에 제한이 없이 계속 담임목사로서 모든 목회를 계속해 가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용삼 목사님의 은퇴는 11월 26일과 관계 없이 교회가 안정되어질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는 것이다. 함께 새로운 목회자 청빙을 그리고 그 후의 당회 구성까지도 행정전권위에서 마친 후 안정된 교회가 될 때 행정전권위가 해산되는 것이다.

그날 노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다 듣고 보았다. 이용삼 목사가 한 발언과 행정전권위원회 구성이 결정된 후 이목사가 짓던 표정을. “이미 결정된 사항에 무슨 토의를 하자는 겁니까?” 노회 사상 최초의 임시노회를 초래케 한 바로 그 당사자인 이용삼 목사가 행정전권위원회 구성이 의제로 나와 자신의 말대로 교회가 접수 당하는데 담임목사로서 내놓은 유일한 발언이다. 혹 토의를 하다가 행정전권위 구성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이 됐던 것일까? 입에 발린 말이라도 “해당 교회 담임목사로서 송구스럽다”라는 한 마디조차 없었다. 그리고 “행정전권위원회 구성에 대한 재고를 바랍니다”라는 발언은 장로만 해야 할 말이었던가?

솔로몬에게 아기를 반으로 잘라달라던 엄마와 아주 비슷한 모습을 이목사는 임시노회 하루 전날 보여주었다. 가사모 집사 몇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대화 시도를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어느 장로님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렸고 그 장로님이 이목사에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내일 노회가 열리는데 노회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우리가 만나서 한 번 해결방안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 전화드렸습니다.” “O 장로가 언제부터 교회를 그렇게 생각했소?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만날 생각 없어요.” 또 다른 말이 필요한가? 다음날 노회에서 “우리 가나안교회는 마지막 순간에 장로님과 목사님이 대화를 통해 양보하고 해결점을 찾아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오늘 노회는 회의 대신 저희 가나안교회의 치유를 위한 기도회로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발표를 하고 눈물을 흘릴 실날 같은 희망이 날아가고 있었다.

“이용삼 목사는 교회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간에 제한이 없이 계속 담임목사로서 모든 목회를 계속해 가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용삼 목사님의 은퇴는 11월 26일과 관계 없이 교회가 안정되어질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인가? 이 말을 당당히 할 기회를 기다리느라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용삼 목사와 같은 목사가 기간에 제한 없이 계속 담임목사로서 목회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공동의회라는 것이 있다. 행정전권위원회가 있어도 교인의 청원에 의해 공동의회는 소집될 수 있고, 여기서 과반수가 담임목사의 목회를 반대하면 11월26일 전이라도 나가게 할 수 있다.

가나안 성도 여러분, 이동관 목사가 대동교회 청빙에 응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면서 이동관 목사 청빙을 엊그제 까지도 주장한 이용삼 목사의 속셈을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은퇴할 생각이 없어진 이목사에게는 교회의 문제가 필요했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기로 한 이동관 목사는 가사모가 막아서 못 오는 것으로, 당회에서는 청빙이 결정된 이동관 목사의 사례를 책정해주지 않아 정회하고 퇴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유로 당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은퇴를 무산시킬 명분을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입니다.

이젠 가사모, 성지모, 중도와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골치 아픈 것을 피하고 나의 안위를 위해 잘못된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시렵니까? 훗날 “옳지 않은 목회자로부터 가나안교회를 구하기 위해 너는 무엇을 했느냐?”라고 질문을 받으면 “교회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만 하시겠습니까?

다행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강제로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어쩌면 그보다 더 교묘하고도 강한 세력의 도전을 이겨야 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신앙을 위협하는 도전에 대항하는 용기뿐 아니라 영적 분별력과 지혜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은 명확한 도전이라서 믿음의 용기만 있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종에게 대적하면 벌 받는다”는 위협은 옳은 종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분별력이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교회를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물과 노력 그리고 섬김을 통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지금은 옳지 않은 자가 주의 몸된 교회에서 더 이상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하는 섬김이 요구되는 때 입니다.

혹이라도 “가사모가 이목사 내쫓아주면 좋고, 이목사가 그냥 눌러 앉으면 교회를 떠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가나안교회에 서게 되는 날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