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
하느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셨을 때 과연 누구의 선동으로 십자가를 지셔야했고,
누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 하셔야 하셨던가?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율법을 합리화함으로 합리화 된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 죄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 죄인을 구하시기 위함이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합리화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셨다.

오늘 날 시카고에서 발생하는 교회사건들이 그 때와 다르지 않다.
목사가 성경을 합리화하는 것이나 합리화 된 성경을 배워서 생활에 운용함이 그렇다.

시카고사람 둘만 모이면 가나안을 욕하거나 가사모를 욕하는 이야기라 한다.
그런데 가사모가 노회의 결정을 기다리다 못해 이 강추위에 총회에 진정용으로 범 동포 차원의,
서명을 받는다고 한다.
그 것도 노상에서!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김 0철(가명)이란 목사가 “팔만 비신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니
집에 가서 기도하고 있어라”고 강권하는 말씀과 함께
“노회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 이야기를 잘 해 주겠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사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 목사란 분은 가사모의 피켓시위가 타  민족에게 어떻게 비추어지겠는가를
먼저 고려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그리고 좀더 일찍 그들 목사님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토론의 장을 열어
가나안의 사건을 수습하려 노력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본인은 이러한 생각을 저변에 깔고 성경에 있는 말씀을 몇 구절 상고해 보려한다    
기도하라! 골방에서 기도를 해도 그 열매는 행위로 결실된다.
행위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더불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서명운동이란 기도의 열매가 아닌가!

이와 같이 행위란 결실을 거두지 않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주님이 피를 흘려 씨를 뿌리신 행위의 모독이다.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골방에 앉아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며 어떤 사람처럼 “누구의 생명을 거두어 주십사”하고 소원하거나 저주의 편지님을 작성하여 난무시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 인가하는 의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이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한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이 짠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첫째 소금이 녹지 않으면 짠맛이 없다. 소금은 소정의 열과 습기가 없으면 녹지 못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녹는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이고 헌신의 상징이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썩어 가는 그 곳에서 자신을 녹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란 말이다.

빛을 발광하는 것도 자신을 태워 재가 될 때 얻어지는 물리적 형상이다.
빛은 어둠을 물리칠 때 꼭 필요한 열량이다.
이 행위 역시 구속이 아닌 스스로의 자기 헌신을 가르치는 행위이다.

본인은 이제 가사모의 형제들에게 감히 선언합니다
귀하들의 지난 30년의 신앙 생활은 영광이 아니라 사기 당한 치욕의 생활이었습니다.
귀하들의 영광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자신들을 헌신하는 현실의 고통에서 일어나는 빛입니다.
귀하들의 영광은 썩어 가는 곳에 녹아지는 소금이 되어 헌신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는 8만 비 신도들을 구원하는 첩경이요,
사기 당한 신앙 인들에게 정의를 계시하는 모델입니다.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종합상가가 아니라 저마다의 능력을 헌신하는 구심점입니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빛과 소금이 되려하는 그 곳에 목사님이 없다 하여도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성경을 통해 선언하여 격려하려 합니다                       최 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