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계엄선포 담화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우리처럼 그냥 교회 열심히 다니고,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읽으면서, 교회 주차장에서 부엌에서 열심히 봉사하면 그 자체가 즐거움이요 행복이었던 일반 평신도들은 노회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행정전권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내놓은 Road Map인지를 보면 군사정권의 계엄선포 담화문을 읽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공포와 분노가 일어난다.

그 공포와 분노의 근원지는:
1. 또 은퇴일을 미루는구나.
2. 행정전권위원회 발표문의 마지막 부분은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한다. 아래에 그대로 옮겨본다. 혹시 면역이라도 생길지 누가 아나?
“행정 전권위원회는 위에 명시한 절차를 가나안 장로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확정하여 진행하고, 만일 이번 절차를 고의로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가나안 장로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깨뜨리는 사람으로 인정하여, 당회와 노회의 권한으로 응징할 것을 확고히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나 흥분을 가라 앉히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다시 한번 그들이 내놓은 Road Map을 하나씩 뜯어 읽어보자.

소위 “가나안 장로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한 Road Map”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이것저것 복잡하게 써놓았지만 결국 후임목사 청빙과 이용삼목사 은퇴에 관한 얘기이다. 후임목사는 2번에 걸쳐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한다는 얘기이다. 그것도 안되면 임시목사를 파견할 것이란다.

1. 11월 한달동안 찾아서, 12월 11일에 후보자를 발표하고, 12월 31일에 공동의회를 실시하고, 1월부터 임시목회를 시작하고, 2월 12일 정기노회에서 절차를 밟고, 3월중 위임예배를 갖는다.

2. 이것이 부결되는 경우, 1월 1일부터 잠정 설교자가 설교를 하고, 1월중에 다른 후보를 찾고, 2월 12일 정기노회에서 후보자를 발표하고, 2월 25일 공동의회를 실시하고, 3월부터 임시로 목회를 시작하고, 5월 14일 정기노회에서 절차를 밟고, 위임예배는 5월 14일 이후로 한다.

3. 이것도 부결되면, 3월 1일부터 임시목사 (임기 12개월 미만)가 목회사역을 한다.

위의 세가지의 어떤 경우에도 2월 12일 정기노회에서 상정하는 이용삼목사의 목회관계해소가 이루어지고 3월 31일자로 은퇴한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아쉽게도 후임목사의 결정유무나 시기와 관계없이 이목사는 가나안교회와 연을 끊게 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한가지 있다. 이용삼목사의 목회관계해소를 왜 2월 정기노회까지 끌고 가서 3월말일자로 은퇴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유는 후임목사가 누가 되던지 최소한 한달의 transition period를 갖고자 함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3월말일 바로 전인 2월 정기노회에서 결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11월 정기노회에서 이용삼목사의 목회관계해소를 결정하고 은퇴일은 3월말일로 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노회가 미리 결정하는 것은 노회가 한통속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아주 극히 일부의 교인들의 의심을 풀어줄 수 있어서 좋고, 이목사의 명예회복에도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용삼목사의 목회관계해소는 11월 정기노회에서 결정하되 은퇴일은 3월 31일로 한다]

또 한가지는 이용삼목사가 하는 목회날짜이다. 첫번째 청빙에 성공하면 1월중에 후임목사가 와서 저절로 목회현장에서 떠나게 되도록 되어 있는데, 12월 31일 실시한 공동의회에서 결정된 후임목사가 1월 1일자로 부임한다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동네 반장도 이보다 더 시간을 준다. 그러면 이 경우에 1월 1일부터 후임목사가 실제로 목회를 시작하는 날까지는 누가 목회활동을 한단 말인가? 이용삼목사가 그냥 한다고? 첫번째 청빙에 실패할 경우에 1월 1일부터 잠정설교자가 설교하도록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 청빙에 성공할 경우엔 왜 준비가 없는가? 이러한 혼란스럽고 원칙이 없는 방법보다는 11월 26일까지 이용삼목사가 설교를 하고, 그 이후부터 후임목사가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는 날까지 잠정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것이 혼란도 줄이고, 안식년을 심하게 손해 본 이목사에게도 덜 미안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또한 이목사가 평소에 철학을 가지고 주장해온 65세 은퇴에는 아쉽게도 못 미치지만, 그래도 30년을 맞이하는 날에 은퇴를 하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주는 것이 마지막 가는 사람에 대해 돌을 던지지 않는 일이 아닐까?
[이용삼목사의 설교와 목회활동은 11월 26일로 마치고, 11월 27일부터 잠정설교자가 후임목사의 목회활동 시작전까지 설교와 목회활동을 한다]

이용삼목사의 은퇴에 대한 대우는 행정전권위원회에서 초안을 마련해서 12월 31일 공동의회에서 결정하게 되어있다. 우리는 그 대우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원로목사, 몇십만불의 현금, 사모 자동차, 사무실, 예술학교 운영권, 선교비, 등등 말이 많이 있었는데, 이목사 당사자는 목사의 자존심을 걸고 택도 없다고 그런 것 필요 없이 깨끗하게 떠나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했고, 우리는 그 대우라는 것을 감도 잡을 수 없고 이해할 수 도 없다. 물론 행정전권위원회에서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안을 마련해 오겠지만, 만일 그 안이 많은 교인들이 인정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부결되면 이목사의 은퇴는 은퇴 대우가 결정 안되어서 못하는 것인가? 이전에 중재안이라고 내놓은 노회의 의견을 이목사에게는 야합이라고 느껴지게 한 전과가 있으니 심히 걱정이 된다. 그러니 만일 은퇴대우가 필요하다면, 미리 은퇴대우 정도를 공표하여 의견을 모으고 조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대로 이목사의 목회관계해소가 11월 정기노회에서 결정된다면 12월 공동의회에서 결정하는 은퇴대우는 훨씬 쉬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용삼목사의 은퇴대우는 미리 공표하여 공감을 얻는 수준에서 미리 의견을 수렴한 후 공동의회에서 결정한다. 만일 이목사의 은퇴대우가 결정되지 못하더라도 이목사의 은퇴는 불변이다]

후임 목사 투표 결과를 결정하는 방법을 무척이나 어렵게 써놓았다. 전제는 과반수라고 해놓고 노회법 조항까지 써놓았지만 이것은 다수표를 말하는 것 아닌가? 참고로 써놓은 것을 읽어보면 웬만한 범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과반수는 넘지만 2/3가 안되면 사회자가 청빙을 하지 말자고 제안하고, 그래도 청중이 청빙하자고 우기면 노회의 목회위원회에서 청빙하지 말자고 제안한단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2/3를 넘지 못하면 청빙할 수 없다. 이것은 예전에 이용삼목사가 이동관목사 청빙 때 보여준 과반수 날치기를 조금이라도 감싸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은 왜 드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투표결과 결정방법을 정하니 노회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이제라도 이목사의 눈치 따위는 그만보고 정확하게 명기하도록 하라.
[후임목사 청빙은 과반수가 아니라 2/3로 결정된다고 확실하게 명기하라]

아직도 궁금한 점이 있다. 왜 전임목사와 후임목사가 오버랩되어서 동사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인수인계할 것이 많은가? 만화 같으면 누구 성질이 어떻고, 누가 돈이 많고 적고, 누군 짜고 싱겁고, 이중장부 기재법, 돈세탁, 교회의 면세를 적절히 이용한 절세법(절대 탈세 아님), 우리편과 적을 구별하는법, 헌금 많이 내게 독려하는 법, 친인척 심는법, 등등을 가르쳐야겠지만, 그거야 만화 아닌가? 실제로는 당회장/담임목사가 바뀌어도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후임이 와도 알려줄 것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실제 일은 모두 각각의 부서와 담당 장로/집사들이 집행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는 알 수 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은혜 충만한 가나안교회에선 이용삼목사가 모든 것을 관장했으니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이 경우엔 후임목사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니, 원안대로 각부서에서 이목사와 인수인계를 하면 될 것이다. 이 인수인계는 후임목사와 전혀 관계가 없다. 각 부서와 이목사 사이에서 이루어지면 되므로 다음주부터라도 시작하는 것이 옳다. 후임목사가 온 이후엔 각부서에서 후임목사에게 보고하면 된다.
[이용삼목사는 각 부서와 인수인계를 즉각 시작하라]

우리는 더 이상 계엄군이나 계엄령이 없는 평화스러운 교회를 회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다시 교회가 은혜로 충만하고, 성도간에 사랑이 가득하고, 서로 앞장서서 봉사하고, 생업도 뒤로하고 선교에 나서는 그런 교회를 다시 다니고 싶다. 이러한 수백명의 소망이 단 한사람이나 단 하나의 위원회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지 않기를 엎드려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