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청빙, 무엇이 문제인가?

1885년 알렌과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은 지도 어느 듯 12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1천만 기독교인을 자랑하였으나, 21세기 들어 침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 등과 같은 교회 외부적 요인도 한국 교회 침체의 한 요인이지만, 다시 제2의 부흥을 준비하자면 우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 어느 때보다도 한국 기독교는 철저한 자기 성찰적 진단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한국교회의 침체

한국 교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내부적 요인 역시 다양하지만 후임 목회자 청빙과 관련된 잡음 역시 위기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경제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해방 후 대기업이 한국 경제를 주도하였듯이, 20세기 말까지 대형교회가 한국 교회 성장의 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성장이 아니라 분배와 복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대기업들이 점점 그 설 자리를 잃어감에 따라 한국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듯이, 한국 교회 역시 평신도의 성경공부와 영성 신장으로 교회에 대한 인식이 바뀜에 따라 대형교회가 점점 약화되고 그와 더불어 기독교계 전체의 침체를 가져오고 있다.

대형교회의 침체원인은 후임목사 청빙문제에 있어

대형교회 침체의 근본 원인은 교인들의 의식 수준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후임 담임목사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아름답게 청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몇몇 대형교회가 후임 목회자 청빙을 마무리 지은 단계이지만, 여전히 그 후유증은 우리 기독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제로 영락교회, 소망교회, 광림교회, 광성교회, 충현교회 등은 아직도 ‘제2대 담임목사’가 영적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세계 최대의 교회를 자랑하는 Y 교회도 후임 목회자 청빙이 마무리 되었다. 당회와 공동의회를 통해 후임자를 선정하였으니 비교적 ‘깨끗한 절차’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J 목사가 정년을 연장하면서 후계자 선정을 주도하고 있으며, 앞으로 2년 동안 후임 목회자와 공동목회를 하겠다는 발상은 왠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이제 한국 교회가 제2의 도약을 꿈꾸자면, 아니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고자 한다면 바람직한 후임 담임목사 청빙 절차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대부분의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은 은퇴를 해야 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논리에 내맡겨둘 수 없다. 성서적이지 못한 담임목사 청빙은 분명 ‘좋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후임 목회자 청빙, 잡음 끊이지 않아

현재 수만 명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개척 목회자 일인의 치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개척 목회자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다. 아마 카리스마적인 권위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수많은 영혼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교회의 경우 누가 후임 목회자가 되어도 지금처럼 교회가 성장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도 대형교회가 적어도 현 상태로라도 유지하려면, 후임 목회자는 선임 목회자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와 같은 평신도 신앙 운동 및 인터넷을 통해 자유 언론 탓으로 평신도의 영적 수준 및 권리 의식이 향상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후임 목회자는 개척 목회자보다 아니 더 큰 영적 권위를 가져야만 교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교회를 책임지시기 때문에 후임 목회자의 권위가 문제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상이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제2대 목회자가 부임한 몇몇 교회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후임목회자의 영적 권위 중요

문제는 후임 목회자가 영적 권위를 어떻게 확보하는가의 물음이다. 이제까지 몇몇 대형 교회 담임목사는 자신의 권위를 후임 목회자에게 물려주려고 몸부림쳤다.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그 영력을 갑절로 부어주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왜 실패하였는가? 그것은 성경에 대해 오해 탓이다. 엘리야는 결코 엘리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아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셨다(왕상 19:16) 엘리야가 한 일은 엘리사를 자신의 후임자로 지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명한 후임자에게 자신의 영적 권능을 전수하였을 따름이다.

그것도 엘리사의 간절한 소망에 따라서 말이다. 결코 엘리야가 먼저 엘리사에게 영적 권능을 전수하고자 하는 ‘공동목회’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제안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엘리야는 엘리사의 영적 권능 전수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 반대로 돌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아니라 현재의 담임목사가 후임자를 ‘지명’한 후, 후임자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신의 영적 권능을 전수하고자 공동목회를 하고 있다. 아니 공동목회의 올가미를 만든 다음 이 올가미를 받아들이면 후임 목회자로 허락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는 후임 목회자의 영적 권위가 회복될 수 없다.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적 지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성경 속에 가장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가장 성공적인 지도력 이양을 든다면 우리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력 이양을 들 수 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도자로 선출되는 과정을 민수기 27장 15절에서 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자기 육체의 생명이 끝난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목자를 세워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그를 불러 안수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백성들 앞에 세우라고 응답한다. 그런 다음 제사장 엘르아살은 우림의 판결법에 따라 여호와의 뜻을 물은 다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후계자를 지명하여 세우는 방식이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웠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여호수아를 제2대 이스라엘 지도자로 세운 자는 지도자 모세도 제사장 엘르아살도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제사장은 우림의 판결법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물은 다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위임하였다. 우림의 판결법이란 일종의 제비뽑기이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를 어떻게 제비뽑기를 선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비뽑기를 주관하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이 방법에 기꺼이 순종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성경은 제비뽑기를 말한다.

이는 구약시대에는 가능한 일이고 오늘날의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도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거나 집사를 세울 때 제비뽑기 방법이 사용되었음을 기억하자. 오늘날에도 제비뽑기가 후임 목회자를 청빙하는 최선의 방법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이를 교회에 적용할 믿음과 용기가 없을 따름이다. 이는 두 가지 전제가 성립되어야 가능한 방법이다. 하나는 청지기 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이다. 즉, 목회자 개인의 영적 카리스마에 의해 오늘날의 대형교회가 탄생되었다 해도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교회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자각 하에 우리 모두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분명한 자각이 없이는 제비뽑기를 실천하기 어렵다. 또한 그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교회를 지키신다는 절대적 믿음이 없어도 이 방법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3배수, 5배수 압축한 다음 제비뽑기 필요

그렇다고 완전한 제비뽑기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유다를 대시한 사도를 세울 때처럼 당회와 공동의회를 통해 3배수 내지는 5배수로 후보자를 압축한 다음 최종 청빙 절차로 제비뽑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의를 제기하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인이야말로 믿음이 없는 자이다. 혹시나 모를 주최 측의 부정을 예방하자면 제비뽑기 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대예배 시간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이 일을 맡길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에 대해 이는 도박이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물론 이는 일종의 도박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왜 제비뽑기를 거부하는가? 제비뽑기에 하나님의 영적 권위가 있었음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한국 기독교계가 이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청지기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윗의 솔로몬 왕위 계승은 실패작

물론 제비뽑기가 아니라 후임자를 선임자가 지명한 선례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그 왕위를 계승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솔로몬의 왕위 계승은 아름답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해준다. 우선 결과적으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은혜의 선물로 받아 성전과 왕궁을 건설하였지만, 우상을 숭배함으로 남북 분열의 원인 제공자가 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 과정에 왕자들 사이에 피를 흘리는 권력투쟁을 야기하였다. 또 일부에서는 예수님도 열두 제자를 직접 부르시고 공동목회를 통해 훈련시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는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결코 교회를 만들어 담임목사직을 수행한 적이 없다. 또 예수의 열두 제자와 오늘날 교회의 담임목사는 그 본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말로 제자는 섬기는 자였지만, 대형교회의 담임목사는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닌가?

교회는 “교인의, 교인에 의한, 그리고 교인을 위한” 정치가 되어야

제비뽑기를 채택할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정서상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적 지도력은 국민의 동의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선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 근본이념에 충실하게 따르는 방안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한다. 이를 교회에 적용시키면 “교인의, 교인에 의한, 그리고 교인을 위한” 목회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권위가 국민의 동의에서 얻어지듯이, 목회자의 권위도 교인의 동의로부터 얻어져야 한다. 이것이 만인제사장설에 대한 민주주의적 해석이다. 다시 말해, 목회자의 영적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하나님께서는 만인제사장인 교인들의 동의라는 절차를 통해 담임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영적 권위는 일종의 집합 개념이다.

담임목사는 후임 목회자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의 영적 권위마저 보증할 수는 없다. 영적 권위는 일종의 집합 개념이다. 다시 말해, 영적 권위는 목회자가 지닌 어느 하나의 특정 능력을 뜻하는 게 아니라 목회자가 지닌 여러 능력의 종합에 의해 형성된다. 영적 체험, 말씀, 기도, 찬양, 행정, 상담, 교육, 금식, 은사 등의 목회와 상관된 자질뿐만 아니라 도덕성, 지적능력, 삶의 체험, 성품 등의 도덕적 요소 및 인지적 요소도 목회자의 영적 권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담임목사가 후임 목회자에게 목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권면하고 충고해줄 수는 있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를 보증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영적 권위의 다양성

또 한 가지 기억할 사항은 영적 권위에는 정도의 차이뿐만 아니라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영적 권위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영적 권위를 창조하였기 때문에, 한 유형의 입장에서 다른 유형의 영적 권위를 평가할 수 없다. 대체로 교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유형의 목회자를 찾아 교회를 다닌다. 그 결과 현재의 대형교회 교인들에게는 그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영도해 온 현재의 담임 목사가 갖는 영적 권위 유형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유형의 영적 권위를 유일한 영적 지도력으로 간주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목회자가 A 유형의 영적 권위를 가졌는데, 후임 목회자가 C 유형의 영적 권위를 가졌다고 하자. 이럴 경우 이론적으로는 영적 권위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후임 목회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미 A 유형에 길들어진 교인들은 C 유형의 후임 목회자를 A 유형의 잣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후임 목회자는 영적 권위를 세우기가 어렵게 된다.

제사장인 교인들의 동의

이러한 경우 후임 목회자가 자신의 영적 지도력을 세우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영적 권위 위형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경우 실패로 끝난다. 왜냐하면 후임 목회자가 이제까지 40-50년을 살아온 삶의 현장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전임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이르려고 해도 이는 불가능하다. 즉, 후임 목회자는 전임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하거나 아니면 단순한 외견상의 모방으로 끝나기 쉽다. 다른 하나는 교인들이 C 유형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길이다. 그 어떤 방법을 취해도 전임 목회자가 후임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보증할 수 없다.

후임자 청빙은 만인제사장인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야

따라서 후임 목회자의 영적 권위를 보증할 수 있는 차선책은 앞에서 언급한 만인제사장인 교인들의 동의를 얻는 길이다. 현재의 모든 교단 헌법은 이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당회와 공동의회를 통한 후임 목회자 청빙이 바로 그것이다. “위임목사의 청빙은 조직교회라야 한다. 당회의 결의와 공동의회의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헌법 제2편 정치, 5장 목사, 제28조 목사의 청빙) 하지만 현재의 이 절차는 그 정당성이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당회에서 후임 목회자 1인을 결정한 다음 이를 공동의회에 회부에서 2/3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공동의회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게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공동의회에 좀 더 무게를 주는 방향으로 청빙 절차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 즉, 교황 선출 방식을 우리 교회에 원용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황 선출 방식을 채택하자.

신의 대리자임을 자임하는 가톨릭의 교황도 자신의 후계자를 직접 지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 선임에 그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은 철저하게 교황이 서거한 다음, 그것도 독특한 ‘교황 선출 방식’에 따라 새 교황을 뽑는다. 추기경들이 무기명으로 계속 투표하여 2/3 득표를 얻은 자가 나오면 그 신부가 후임 교황으로 결정된다. 우리 교회도 가톨릭의 교황 선출 방식에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다만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당회에서 1인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3내지 5배수 복수로 추천하여 공동의회에서 2/3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 투표하여 출석 교인 2/3 이상의 찬성표를 획득한 자를 후임 목회자로 최종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는 전임 목회자 재임 기간에 후임 목회자를 선정함으로 말미암아, 전임 목회자가 ‘후계자’ 선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를 예방하자면 가톨릭 교황처럼 우리도 전임 목회자가 완전히 은퇴한 다음 후임 목회자를 선출하는 방법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지도자의 공백으로 인해 교회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또 담임목사 중심으로 당회가 운영되어온 현실을 감안할 경우 담임목사가 은퇴해버리면 당회가 온전히 운영되기 어렵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실제로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가 지나치리만큼 담임목사 1인에게 의존해 있음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처럼 담임목사 퇴임 후 후임 목회자 선출이 오히려 더 큰 혼란만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혼란을 완화하자면 노회 원로목사를 청빙위원장으로 모시는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담임목사가 명예롭게 은퇴한 다음 그 교회가 속한 노회의 원로 목사 가운데 교계에서 영성과 덕망을 갖춘 분을 청빙위원장으로 앉혀 그 목사가 후임목회자 청빙을 관장하는 방안을 현실적 대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영적 지도력 이양을 위한 준비 필요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사항은 우리는 목회자의 지도력 이양에 대해 아무런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적 카리스마가 아무리 탁월해도 담임목사는 언젠가는 퇴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면서 지금이라도 지도력 이양 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당회와 교인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사실 담임목사가 6개월 정도 없다고 해서 교회가 분열되거나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교회는 성숙한 교회로 보기 어렵다. ‘선교사가 필요 없는 선교’가 자신이 선교철학이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이 기억한다. 즉, ‘목회자가 필요 없는 목회’가 목회자의 궁극적 목회 철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단기간의 목회자 부재가 교회 문제를 야기한다면, 그 교회는 건전한 교회라고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

담임목사는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 없어

모세도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사사시대의 그 어느 누구도 다음 사사를 지명하지 않았다. 담임목사는 후계자를 지명할 권한이 없다. 후임 목회자 청빙은 하나님 손에 맡겨야 한다. 제비뽑기가 어렵다면 교황선출 방식이라도 채택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담임목사의 후계자 지명은 또 하나의 권력 연장이요, 위장된 세습일 따름이다. 담임목사의 후계자 지명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또 하나의 ‘신앙’이 아닌가? 내 목회 철학과 다르게 교회가 움직여 가면, 대부분의 우리는 “저게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교회가 운영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와 다르다고 해서 곧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 다른 방식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교회를 위한 헌신은 아름다우나 교회에 대한 집착은 추하다. “제발 좀 하나님을 믿자
    에클레시안 김상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