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 중 하나가 신앙을 구실삼아 상식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라 불리고 목사가 ‘먹사’라고 비아냥거림을 당하게 된 것도 교회나 목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상식을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는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다. 하지만 상식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법칙을 존중하고 지키지 않으면 상식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들이 결코 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지닐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 까지도 그 행동에 있어서는 양심과 같은 상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이를 따르려 애쓰고 있다.

2년 이상을 끌어온 끝에 곧 있을 결과를 기다리는 가나안 장로교회 사태도 알고 보면 상식을 무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목사, 장로, 집사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에 따라 행했으면 이 지경까지 올 것도 없었다. 우리는 “은혜롭게” 또는 “교회니까…”라며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이 무시되는 것을 방치한 대가를 호되게 치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목사님을 떠받드는 신앙은 부족하나 그른 것을 그르다고 주장하는 상식을 되찾은 대다수의 성도들이 진통 속에서도 잘못된 교회를 바로 잡아가고 있지만, 일부는 끝까지 상식을 무시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어 가나안교회뿐 아니라 기독교가 여전히 욕을 당하게 될 상황을 만들고 있다.

지난 2월에 있은 링컨 트레일스 대회의 사법전권위원회 재판에서 이용삼 목사 측의 변호인이 “우리는 미국장로교 교단을 탈퇴하려고 중서부 한미노회 탈퇴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카고노회로 옮겨 가려고 탈퇴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사법전권위원 중 한 사람이 “시카고노회로 옮겨 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던가?”라고 물었고, 변호사는 편지 한 장을 들어 보이며 “한미노회에 문서로 요청했다”고 답했다. 그 문서라는 것이 한미노회가 시한을 정해 탈퇴번복 권고 결의를 하자 이목사가 변호사를 통해 시한에 임박해 제출한 것으로서 “한미노회에서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면 시카고노회로 가겠다”라는 문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제 4월 25일 최종 판결 일이 다가오자 이목사 측은 서둘러 502명이 서명했다고 하는 노회 이전 관련 청원서를 들이 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 청원서가 가관이다. 어느 가정은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해 멀리 떠나 있는데도 부모와 같은 필체로 이름과 서명이 들어있다. 누가 봐도 짐작이 가는 그런 서명이 한 둘이 아니다. 또 이목사 측근의 장로는 시카고노회 인사와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전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점잖게 거절을 당하기도 했다. “노회를 옮기려면 교인들의 투표가 있어야 하고 현 소속 노회와 옮겨 가고자 하는 노회가 만나 합의를 봐야 한다. 특히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인 교회의 노회 이전은 규례서에 따라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 거절 이유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고 말이 안 되는 것인 줄 몰라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지만 타지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집어 넣어 서명을 하고, 노회를 옮기겠다면서 규례서가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 지도 고려치 않는 것이 도대체 상식적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지? 이렇게 해서 재판에 이긴다면 정의의 승리인가 꼼수의 승리인가? 대회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면 “링컨 트레일스 대회는 부당하니 다른 대회로 옮기기 위해 탈퇴한다”고 또 다른 날치기 공동의회를 열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기독교 신앙은 분명히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을 인정하기에 상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위대함을 우리가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