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웅 입니다.

평생을 교회를 다니고 인생의 반 정도를 가나안 교회에서 섬겼습니다. 지금은 국방의 의무를 하기 위하여 가주에 있는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가나안 교회 청년부 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성령을 체험했고 고등부를 거쳐 청년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땡깡 부렸던 장본인 입니다. 대학부가 흐지부지 없어지고 청년부에 들어가 뻔뻔하게 내집인양 설치고 다녔던 변덕쟁이 이기도 합니다. 철없는 시절을 보내고 아직 철이 다 들지 않았지만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이기에 가나안은 마음 한 구석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많이 힘들다며 눈물흘리며 제게 전화하시는 어머님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저는 가나안 교회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자세한 내막을 모른채 이렇게 글을 적어 내려갑니다. 내막과 상관없이 지켜져야 할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부족한 펜을 굴립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기에 목소리를 높여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나아가야 하는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예배에서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소는 우리가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휘장이 찢어지기 전까지 지성소는 아무나 가서 하나님께 할말 못할말을 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당, 성소라고 하는 곳은 바로 그 지성소 입니다. 대 제사장으로 서 계신 목회자에게 언성을 높이는것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외면하면서 까지 베풀었던 은혜에 대한 참으로 어이없는 행동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전 어렸을때 이목사님 사모님이 참 무서웠습니다. 예배당에서 물만 마시다 적발되어도 혼났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배당의 의미와 뜻은 그보다 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일주일간 죄 속에 살다가 그럴싸한 양복 걸치고 반들반들한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고개 빳빳히 들고 들어와서 꾸벅꾸벅 졸수 있는 예배당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예배 중에는 더더욱 안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당하기 어려울 뿐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중에는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예수를 믿고 성경을 가까이 하신 분들이 상당할줄로 믿습니다. 그런점을 알기에 더 조심해스럽습니다. 저는 평신도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본적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인용하는 성경말씀에 대한 해석이 잘못 되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가르침은 기쁘게 받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이용삼 목사님의 자잘못을 가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평신도와 목회자로써 지켜야할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씨족 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넘어가고 출애굽 전에 국가단위로 불어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넘어가서 여호수아를 지나 사사기를 지나고 사무엘을 지나 왕정국가로 변합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에서 포로기로 또 해방과 또 다른 구속을 지나면서 모세부터 내려오는 레위인들과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십니다. 레위인은 농사를 지어서 생활하지 않고 다른 백성의 분깃으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제사장들을 위해 십일조의 일부를 나누어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레위인과 제사장의 다른것입니다. 교회는 크게 둘로 나누어 집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목사님, 강도사, 전도사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다 평신도 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평신도가 내는 십일조의 분깃으로 생활하지 않습니까? 목회자는 생활부터 복과 벌까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실행하십니다. 하나님이 맡아놓고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대상이 목회자 입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민주주의 였습니까? 민주주의 사회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 뿐이지 교회는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독재도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지금 민주주의 자유경제체제 속에서 변화된 교회의 모습이 목회자를 단지 하나의 직원으로 취급하고 장로들이 중심이된 장로교단에서 원하는 뜻을 따라가고 성도들이 투표를 해서 교회를 끌어 나가는것, 어떻게 보면 어렸을때 부터 이상적인 민주주의 집단을 꿈꿔온 우리로써 당연한 거겠지요. 북한의 교회는 공산주의 교회이고 독재 교회입니까? 북한의 교회에는 하나님이 독재를 하게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물론 우리도 왕같은 제사장이지요. 우리가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싸우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왕이고 제사장은 목회자입니다. 왕으로써 실패한 사울을 다윗은 그의 힘으로 끌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이 끌어 내리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운명, 목회자의 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차원의 문제가 아닌것에 목숨걸고 있습니다. 거의 30년간 가나안 교회가 성장해 왔습니다. 살만 찌운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목회자를 양성하고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며 세상에 나가서 싸울 성도들을 양육해 왔습니다. 가나안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삶이 변화한 사람들을 저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가나안 교회가 아니었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러한 영혼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나안 교회를 사용하신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런 영광중에 있는 교회를 어지럽히는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는 이용삼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목회자로써 개인적으로써. 제가 해병대에 입대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용삼 목사님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는 이용삼 목사님은 다를수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 바라보는 목사님의 모습은 조금씩 다를수도 많이 다를수도 있지만 모두다 주관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확실한것은 그 누구도 다른이를 정죄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전 목사님이 혹 중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돌을 들 수 없습니다. 절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목사님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고 주일마다 왔느냐고 따뜻하게 손잡아 주시는 목사님의 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주를 빼먹으면 설교테이프를 보내주셨던 목사님을 알기 때문이고 대쪽같이 곧은 성품을 청년들을 위해 너그럽게 숙여주셨던 목사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 눈이 멀었습니까? 네. 어쩌면 제 눈은 멀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어떤분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새 계속 울며 전화하시는 어머님의 슬픔의 이유는 목사님께로 향한 연민도 있겠지만 그럴줄 몰랐던 사람들의 차가운 뒷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님은 그럴줄 몰랐다며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서울 수 있느냐고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집사는 커녕 집사 근처에도 못가본 사람입니다. 하지만 집사가 되면 성도들 앞에서 웃고 예배시간에 언성 높여서 삿대질을 해야한다면 전 장로직을 준다해도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단지 몇분들이 목회자에게 서운한 언행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정작 두려운 것은 그분들로 인하여서 교회가 어지러워 진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키운 교회를 어지럽게 해서 패가 갈려서 서로 피하고 의심하게 만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버틸것인가 하는 걱정입니다.

이렇게 쓴 글을 읽고 감동과 변화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저도 내가 할일은 여기까지다 하며 발뺌하는지도 모릅니다. 실제 아무것도 안하며 변변치 않은 글이나 몇자 적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안량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못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