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강원용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래글 참조)

문득 40여년 전 고교시절 그분의 글 (지금은 제목을 기억하기 조차 희미해진)  “회칠한 무덤….” 을 읽고 참으로 깊은 감명을 받고 강목사님에게 편지를 써서 그 글을 복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으니 허락해 주십사하고 요청한 일이 생각남니다.  (그당시 거짓과 위선을 일삼는 교회와 교인들을 지적한 글로 기억합니다.)

강목사님은 놀랍게도 직접 저에게 직접 답을 해 오셨습니다. 물론 허락을 하는데 학생으로서 먼저 할 일은 잊지말라는 충고도 해주셨습니다. 그때는 복사기가 없어서 초를 입힌 원지를 철필로 글을 쓴 후 등사틀에 붙여 검정 혹은 파란색 기름을 묻힌 롤라를 밑에서 위로 문질러 복사를 해야했습니다. 교회에서 적잖은 양을 복사하여 주위에 있는 친구들에게 돌렸던 지난날의 열정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진보기독교계의 상징적 인물, 강원룡 목사소천

정치와 종교의 대화와 소통, 민주화 크게 기여                                        김성원 amos@newspower.co.kr

강 목사는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출생했다. 용정에 있던 은진중학교 시절, 교사였던 김재준 목사(한신대학장 역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여기서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강 목사는 해방 후엔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건국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김재준 목사를 초빙, 지금의 경동교회를 세웠다. 1956년 미국 유니온신학교 유학 시절엔 폴 틸리히, 나인홀드 니이버 교수를 만나 양극의 극복을 통한 새로운 길찾기를 모색했고, 크리스챤아카데를 를 대화아카데미로 바꾼 것도 그러한 영향이었다.

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 정치, 종교 등의 영역에서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면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 공로로 만해 평화상, 니와노 평화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강 목사는 1970년대에는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방송위원장, 방송개혁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방송 민주화와 자율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노태우 정부 때는 국무총리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는 등 정치권의 손짓을 거절하며 정치와는 일정 거리를 둬왔다.
2000년부터는 평화포럼을 설립,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국제간 연대를 위해 노력해 왔다. 강 목사는 우리 사회가 정치와 경제, 시국 문제로 소용돌이칠 때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대안을 제시해왔으나 최근에는 보수적 입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혀왔다.
강 목사는 지난 9일 병원에 입원했으며, 11일부터는 의식을 잃었었다. 강 목사의 빈소는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에 차려졌다. 장례식은 유족들의 뜻에 따라 경동교회장으로 치뤄지며, 영결예배는 21일(월) 오전 10시 경동교회 본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강 목사는 지난해 4월 8일 강변교회에서 열린 한복협 주최 '내가 잘못했습니다' 고백모임에서 대화와 협력을 잘 이뤄내지 못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강 목사는 “5.16 군사 혁명 당시 많은 고민을 하다가 교회가 화해의 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대립되는 사람들 간에 대화로 풀자는 운동을 62년도부터 전개했으며 64년도에는 타종교간의 대화가 한국에서 일어났다”고 밝혔다. 이어 “가장 먼저 해야 할 대화는 기독교 내에서의 대화인데 오늘날 서로 갈라져 분열하고 대립하고 있다”며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참된 대화와 협력을 정말 이때부터 열심히 했다면 지금 상당히 뭔가 달라지지 않았겠나”라고 밝히고 자신이 해야 될 것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했다.  또한 오늘날 교단주의에 빠진 한국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분히 인간중심인 기독교가 생명중심으로 변화되어 오늘날 죽어가는 지구의 생명을 살리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 목사는 “떠날 나이가 되어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다"고 소회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숨을 거둘 때까지 오늘 반성한 것들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소감을 밝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