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특이하군요!
사실 이러한 제정보고가 정상인데, 어찌된일인지 정상이 비정상이된 교계의 현실에 안타까움이 앞섭니다.
100주년 기념교회로 현재 이재철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유명하시지만, 혹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100주년 기념교회 web-site에 올라와있는 목사님 소개를 그대로 옮깁니다.
이재철 목사님은1949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나왔다.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와 목회수련을 거쳐 주님의 교회를 개척했으며,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임했다. 그 후 총회 파송 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3년간 사역했으며, 임기가 끝나고 돌아와 개인복음 전도자로 집필에 전념하는 한편, 서울의 한 작은 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다. 2005년 7월부터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부르심을 받아 100주년기념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재정보고는 매월 이루어지고, 모든 내용은 web-site 있으며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먼저, http://www.100church.org 로 가신 후에 “안내 및 공지”를 click하시고, “교회에서”를 click하시면은 교회 소식들과 함께 재정보고 내용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4월 결산보고서 내용 (06년4/1~4/30)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1. (4/3) 3월분 생수대금 – 243,000 원
2. (4/10) 주부교실 묘비 청소팀 식대 (17명) – 70,000원
3. (4/17) 전도지 택배비 – 13,000원
4. (4/25) 엄일용 목사, 김건우 연구원 4월분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 305,090 원
5. (4/25) 이재철 목사 4월분 신수비 – 3,100,000 원
6. (4/25) 김순식 목사 4월분 신수비 – 2,900,000 원
7. (4/25) 강은수 목사 4월분 신수비 – 2,700,000 원
8. (4/25) 이영란 전도사 4월분 신수비 – 2,500,000 원
9. (4/26) 4월분 도시가스요금 – 577,770 원
10. (4/30) 4월분 전기요금 – 804,170 원
더 자세한 것은 100주년 교회 web-site에서 보시기를 바랍니다.
혹, 어떤분이 “재정의 규모가 작으니까?” 하고 의문을 갖으실 것 같아서100주년 기념교회 4월 총 재정수입을 가나안 교회 4월 재정수입과 비교해 보았습니다. (가나안 교회의 5월 재정보고는 구두로 이루어져 부득 4월분 기준으로 비교합니다.)
1) 가나안 교회 4월 재정수입 - $ 177,887.37
2) 100주년 교회4월 재정수입 - $ 203,055.34 (193,938,155 원)
*환율: $1 당 995.10원 (6/22/06 현재 외환은행 제공 기준)
비교를 해보니 가나안 교회보다 재정이 더 크군요.
“타산지-석 [他山之石]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다른 산의 하찮은 돌이라도 자기의 옥돌을 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他山之石 可以攻玉)’는 시경의 한 구절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말이나 행동도 자기의 수양에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의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가나안 교회의 행정에 도입해보자는 취지로 글을 올립니다.
(삭제된 Canaan Homepage 게시판 글을 다시 올려드립니다)
3년 예정된 스위스 한인교회로 떠난는 이재철목사
98년 7월 그가 떠나던 날, 공항에 배웅 나온 사람은 가족과 지인(知人) 10여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수천 명이 다른 장소에서 그의 앞날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보냈다.
이재철(李在哲•50)목사. 88년 52명의 신도와 함께 서울 강남YMCA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 뒤 예배당도 짓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온 사람. 이후 신도가 크게 늘었으나 여전히 건물을 짓지 않고 정신여고에 강당을 무상으로 지어준 뒤 그곳에서 ‘더부살이’생활을 하면서도 헌금의 50%를 이웃 돕기에 사용한 목회자. 목회 초기부터 “10년 동안만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떠나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실천한 사람이다.
이목사가 떠날 무렵 ‘주님의 교회’는 신도수가 3천명이 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미련도 갖지 않고 신도수 1백명 남짓의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로 떠났다.
대부분의 국내 목회자는 교회를 일으킨 후 7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다 원로목사로 봉직한다. 종교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시작할 때’는 아름다웠지만 ‘물러날 때’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목사의 퇴임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엄격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교회를 맡은 지 6년이 조금 지난 95년부터 당회에 후임목사를 청빈하자는 안건을 정식으로 올렸다. 교인들이 “아직 4년이나 남았다”며 만류하자 아예 직접 후임목사 물색에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해 오던 일을 부목사들에게 하나하나 넘겨줬다.
때가 되면 물러나는 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나무는 새순이 돋고 가지가 굵어지고 그러다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요. 하지만 때가 되면 낙엽이 돼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스스로 썩어갑니다. 태양은 한낮에 온 세상을 밝히지만 저녁에는 서산으로 자신의 몸을 감추며 사라집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마음속의 ‘욕심’을 버리고 역할을 다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믿습니다.”
이목사의 설명이다.물론 그의 퇴임은 순탄치 않았다.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가족 같은 정으로 뭉치는 한국 교회의 특성상 교인들이 이목사를 고분고분 보내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
수많은 교인이 퇴임을 재고하라며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퇴임 이후에도 이목사는 철저히 교회와 자신을 단절시켰다. 우선 국내에 남게 된 가족 모두가 교회를 옮겼다. 교회가 가족에게 제공하기로 한 약간의 사례금도 거절했다. 한국을 떠날 때 10년간 동고동락(同苦同樂)한 교인들의 ‘마지막 배웅’도 매몰차게 뿌리쳤다. 후임 목사가 정식으로 부임한 지난해 12월까지 신도들의 안부편지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주님의 교회’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소임을 마치고 떠났고 ‘주님의 교회’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새 목사님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해 나가야 합니다. 나는 철저히 잊혀져야 할 사람입니다.”
만년설이 하얗게 덮인 알프스 산을 올려다보며 사는 요즘의 심경을 그는 이렇게 전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히지 말라/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스스로 수백 번 되새겼다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의 시다. 10년간 눈 덮인 들판을 정돈된 발걸음으로 걸어온 이목사는 한국 교회에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발자국을 남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