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한 소녀의 꿈과 사랑 이야기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시 103:8-14, 눅22:61-62

아주 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아주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 제가 고등학생 때와 대학생 때 즐겨 오르던 북한산의 백운대를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등산한 다음 오후에 영화 한 편을 관람했습니다. 경마 경기 중 쓰러져서 다리가 부러진 명마 한 마리에 대한 11살 난 한 소녀의 애틋한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이 안락사를 당했어야 했던 소냐도르란 말이 재기 불가능이라는 경마 세계의 판결을 뒤엎고, 모든 경마인들의 꿈의 대회인 ‘브리더스 컵’에 참가하여 우승의 영광을 차지한다는 감동적인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1993년부터 1995년 동안에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근거로 한 영화였습니다.
먼저, 영화의 내용과 감동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영화의 제목은 Dreamer 즉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꿈꾸는 소녀’라고도 번역을 해 보았고, 영화의 내용을 바탕으로 ‘너는 할 수 있어!’ 라고도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들의 가슴에 전해주는 감동과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재기 불가능의 불행과 절망에 처한 명마 한 마리에 대한 케일이라는 한 소녀의 애틋한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눈빛과 속삭임과 손길이 불가능을 뒤엎고 재기를 이루어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일어날 수 있어! 너는 뛸 수 있어! 네가 뛰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열려! 너는 최고야!” 11살 난 소녀 케일은 다리가 부러진 말 소냐도르를 찾아가서 날마다 그렇게 속삭이곤 했습니다. 소냐도르와 눈을 맞추고 사랑과 격려의 마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매일 자기가 좋아하는 초콜렛 케익을 가지고 가서 자기가 먼저 한 입 먹은 다음 나머지 부분을 말의 입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파산에 처한 아버지가 상처가 회복되어가는 말 소냐도르를 팔려고 했을 때 소녀 케일은 말과 함께 집을 뛰쳐나와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서 딸을 안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딸과 말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결국 소녀 케일의 지극한 사랑은 소냐도르의 재기를 이루어내고야 말았습니다. 6개월 동안 소녀 케일과 아빠 벤의 정성 어린 간호로 소냐도르의 부러진 다리는 기적처럼 회복되었습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의 눈빛을 보내고,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의 속삭임을 전하고,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의 손길을 펴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소녀와 말과의 애틋한 사랑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시키는 결과까지 가져왔습니다. 아빠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아빠와 엄마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아빠와 할아버지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열매들이었습니다. 존 거틴즈 감독은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이 영화는 말에 대한 영화며, 경마에 대한 영화며, 어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지만, 총체적으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이다. 가족들은 처음엔 세대 간의 갈등을 겪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하지만 결국엔 서로간의 믿음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사랑을 되찾는다. 이것이 영화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다.”
저는 Dreamer 라는 제목의 영화를 관람하면서 이 영화에 깊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과 새들과 꽃들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존재에는 깊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선적으로 착한 소녀 케일과 다리가 부러진 말 소냐도르와의 사랑의 관계가 곧 선하신 우리 하나님과 모든 것이 부러져 병신이 된 우리 죄인들과의 사랑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부러지고 깨어진 그래서 재기 불가능의 불행과 절망에 처한 우리 죄인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보살핌과 격려의 눈빛이 마치 11살 난 소녀의 애틋한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의 눈빛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전해주는 또 하나의 종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과 우리 이웃들과의 관계가 케일 소녀와 소냐도르와의 관계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리가 부러진 아니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부러지고 깨어진 병신들이 너무너무 많이 있습니다. 의사들과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과 심지어 상당수의 종교 지도자들의 판결에 의하면 이런 병신들은 모두 안락사 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전문가들의 시각과는 정 반대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전문가들의 판결과는 정반대의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일 소녀가 지녔던 순수하고 착한 시각과 판단을 우리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불행과 절망에 처한 이 세상의 수많은 불우한 사람들을 향하여 케일 소녀가 속삭였던 속삭임을 속삭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일어날 수 있어! 너는 뛸 수 있어! 네가 뛰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열려! 너는 최고야!”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눈빛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속삭임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리와 몸과 영혼이 모두 부러져서 깨어진 불행과 절망에 처한 이 세상의 수많은 병신들을 향해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눈빛을 비추어야 하고,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속삭임을 전해야 하고,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저는 케일과 소냐도르를 보면서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소냐도르가 명마였듯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걸작품 중의 걸작품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과 충성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집에 대한 다윗의 사랑과 충성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그러던 다윗이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아니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의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아니 구원의 자리에서까지 제외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마 천사들은 다윗을 처벌해서 내 버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도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계명을 범하고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져버린 병신이 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내동댕이쳐버리고 말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마치 케일 소녀가 다리 부러진 말 소냐도르에게 취했던 것과 같은 동정과 긍휼의 태도를 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해주셨습니다. 동정과 긍휼의 눈빛을 보내시면서 다윗의 죄를 지적해주셨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성령의 손길로 어루만져주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동정과 긍휼의 손길에 그만 목이 메어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너무 간단한 고백이었습니다. 이 간단한 다윗의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정도의 간단한 고백으론 안돼” 라고 냉정하게 책망하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마음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애틋한 동정과 긍휼과 사랑뿐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 한 마디 말씀으로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마다 자기의 부러진 다리와 온 몸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이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탓하시는 대신 즉시 다윗의 죄를 사해주시곤 하셨습니다. 즉시 다윗의 몸을 치료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애틋한 동정과 긍휼과 사랑뿐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재기 불가능의 불행과 절망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전보다 더 힘있게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전보다 더 힘있게 달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재물과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영적인 다윗 왕국을 이루어 메시야가 세상에 오시는 길을 마련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윗은 천사들과 선지자들 모두의 꿈의 대회인 ‘인류 구원 컵 대회’에 참가하여 최 우승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최고의 영예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다윗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절뚝발이가 된 원수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평생토록 자기 왕궁에 거하며 자기 상에서 음식을 먹게 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에게 시바의 밭을 나누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절뚝발이 므비보셋이 자기는 죽어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며 다윗에게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을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에게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시바의 밭을 나누라”(삼하19:28,29).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죽은 개 같은 시므이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16:11,12). 다윗은 자기를 반역하던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 슬퍼하며 울기까지 했습니다(삼하18:33). 다윗은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리와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진 불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용서와 긍휼을 베푸는 긍휼과 자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저는 케일과 소냐도르를 보면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소냐도르가 명마였듯이 베드로는 제자들 중의 명 제자였고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리가 부러지고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부러지고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3). 그런데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의 자격을 상실했고 신자의 자격까지 상실했습니다. 아니 구원의 자리에서까지 제외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마 천사들은 베드로를 처벌해서 내버리고 말라고 아우성을 쳤을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공감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등지고 디베랴 바다에 가서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믿음도 소명도 사랑도 모두 저버린 배신자가 되었고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져버린 병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져버린 병신이 된 베드로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내동댕이쳐버리고 말았습니까? 아니었습니다. 마치 케일 소녀가 다리 부러진 말 소냐도르에게 취했던 것과 같은 동정과 긍휼과 자비와 격려의 태도를 취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눅22:61을 읽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22:61). 다리 부러진 베드로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한없는 동정과 긍휼과 슬픔과 애탐이 가득히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슬픔과 애탐이 주님의 눈빛에 가득히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슬픔과 애탐의 눈빛을 받은 베드로는 즉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2). 디베랴 바다가 에서의 주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분노와 질책의 모습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은 동정과 사랑이 가득한 “얘들아!”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베드로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부드럽게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슬픔과 애탐과 사랑의 손길이 베드로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닿았을 때 부러지고 깨어졌던 베드로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기적처럼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다시 뛸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뛸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우승을 향해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 모두의 꿈의 대회인 ‘인류 구원 컵 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승의 영광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리는 최우승의 자리에까지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다리가 부러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다리 부러진 병신 같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달려가는 동정의 사람이 되었고 긍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향해 달려가기를 주저하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결국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힘에 이끌려 이방인들을 향해서 달려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악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향해서 달려가기까지 했습니다. 베드로는 다리와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이 부러지고 깨어진 병신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그래서 그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병신들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Dreamer 라는 제목의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느낀 점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명마 소냐도르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다리와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부러지고 깨어진 재기 불가능의 불행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선배들이 다리와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부러지는 불행을 경험했는데 우리들도 그런 불행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런 불행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또한 11살 난 소녀 케일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모습의 일부를 발견합니다. 케일의 착하고 순수한 눈빛과 속삭임과 손길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모습의 일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케일 소녀를 보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님의 슬프고 아프고 진한 사랑의 모습의 일부를 발견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눈빛을 받아야 하고, 속삭임을 들어야 하고, 손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눈빛과 속삭임과 손길에 의해서 부러지고 깨어진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온 몸과 영혼이 부러져서 깨어진 불행과 절망에 처해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동정과 보살핌과 격려와 사랑의 눈빛을 비추어야 하고 손길을 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의 모든 관계가 아름답게 회복될 것입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나라들과의 관계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회복될 것입니다. 치유의 은혜와 관계 회복의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을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전하는 사랑의 도구들로 만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과 베드로에게 주셨던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소녀 케일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사랑의 천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