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는 여지껏 독일 민족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 중에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인류는 이 같은 인물들의 사상에 의해서 오늘도 살아가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의 기수가 되었던 루터는 한편에서는 갈채와 사랑을 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움과 비난을 받으며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힘차게 걸어간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루터의 정신은 역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인정을 받아 왔다. 이 위대한 루터의 생애와 신앙과 업적을 더듬어 보면 많은 것을 깨당게 해 준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16세기로 소급해 올라가서 살펴보면 그의 활동으로 가져온 헤아릴 수 없는 일들 중 으뜸하는 것은 바울 신학을 통하여 깨달은 성서해석의 열쇠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1:17)  기독교의 기본 명제를 되찾았고 사제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후견하는 일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으며, 그의 많은 업적들로는 교황청의 혐오스러운 부도덕성, 소유욕, 추잡한 행동들은 혐오하며 교황청의 독점적 지배권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잘못되어 가는 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던 철두철미 경건한 수도사였던 그가 교회에서 개선되어야 할 남용과 관습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양심 속에서 고뇌로 하나님께 물려받은 실존을 위한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슐로스교회의 문에 게시하고, 이로써 관습에 따라 면죄부에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논쟁을 전개하도록 도전장을 낸 것이다.

우리에게는 루터의 논제들이 여전히 중세기 카톨릭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교황의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보였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때부터 면죄부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익금의 100분의 1도 벌지 못했으며, 로마가 독일에서 전개했던 아주 좋은 사업이 망하게 되었다.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되며 마음을 끌었으나, 이에 반대자들이 격준하자 용감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후퇴했고, 그들은 멀리서 화형을 위한 장작더미를 보듯이 지켜보았다. 면죄를 설교했던 도미니칸 수도회의 수도원장인 테첼은 루터에 대해 이단이라는 악평을 하며 정면으로 도전해 왔기에 교황의 이단자 심분에 맞서는 외로운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이 자기를 파문하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확신하는 진리에 위배되기 보다는 차라리 장작더미에 오르더라도 진리를 위하여 그 모든 것을 감내 하면서 투쟁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제부터 루터에게 있어서는 양심의 문제에 대해 교회의 권위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제정을 받았다는 교황권을 부인하는 라이프치히신학 논쟁이후 보다 더 용감하고 자유로운 성직자들은 모든 측면에서 그를 환호하는 반면에, 한편으로 옛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비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이단 감식가였던 록슈트라덴은 루터를 당나귀이며 분뇨를 파 헤집는 말똥구리에 비유했다. 이로써 루터는 자신을 공격했던 적대자 엠저의 선동에 맞섰다. 당시 엠저는 교회의 기둥으로 활동을 했지만 비밀리에 호색적인 세속생활을 하는 위선적인 경건자였다. 루터는 그를 ‘숫염소 엠저’라는 거친 위트를 사용했고, 엠저를 적대시하는 자들은 ‘숫염소 사냥꾼’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루터의 문서 유포를 금지시킨 마이센의 주교인 슐라이니츠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은 지독한 조소를 가했다.

1519년에서 1520년 사이에 나온 논쟁문서로 친구 랑이 “로마를 향한 공격의 나팔소리”라고 일컬었던 『독일민족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라는 문서와 『교회의 바벨론 포로상태에 관한 전주곡』라는 문서는 거친 폭풍처럼 거침없는 문장으로 되어 있었고 그 내용은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한 대담성을 보여 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수도사의 겸손으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저 유명한 니케아 공의회 (Konzil von Nicäa)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즉 루터는 성서에 근거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붕괴되어 있는 교회를 개혁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며 기묘하게 생긴 장벽 바로  1. 교황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 2. 교황이외에 어느 누구도 성서를 해석할 수 없다. 3. 영적권력이 세상권력위에 있다는 성서의 가르침으로 장벽들에 대한 돌격을 개시했다.

루터는 첫번째 장벽에 해당하는 것, 즉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성서의 기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역사상의 전거를 통해서도 반박했다. 공의회는 베드로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사도들을 통해서 소집되었고, 니케아 공의회는 로마의 주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황제를 통해서 소집되었다. 아울러 로마의 교황과 추기경들, 교황청의 아첨꾼들과 그 사제들의 세상적인 격분하고 로마로 생활 속에서 밝히 드러났듯이 저들의 엄청난 수입에 격분하고 로마로 흘러 들어가는 돈의 흐름을 막음으로서 소정의 목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때에 로마에서는 그가 60일 이내로 문서들을 청회하지 않을 경우 파문을 선고한다는 칙서가 작성되었고 에크(Eck)는 이 문서를 독일로 가져가서 배포하라는 임무를 맡고 왔다. 그러나 루터는 공시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오전 9시까지 엘스터 성문 앞으로 모이라고 권유하고 거기에서 스콜라 철학의 문서들이 겹겹이 쌓인 장작 더미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타오르자,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교황의 칙서를 불 속에 던져 버렸다. “네가 주님의 거룩한 자(즉 그리스도)를 기만했기 때문에”, 또는 아그리콜라(Agricola)가 보고하는 바와 같이,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너를 영원한 불에 살라 버린다.”
이 사건은 1520년 12월10일에 발생했으며, 이같은 행동을 통하여 루터는 옛 교회와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

파문된 루터가 황제에 의해 제국의회의 청문회에 소집되어 주교의 팔츠라는 대강당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 앞으로 인도 되었을때 에크는 루터에게 그의 책들을 철회하겠느냐고 질문했다. 이때 루터는 이렇게 항변했다.

“황제 폐하께서 분명한 대답을 바라신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공손하게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성서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에 의하여 승복되기를 원합니다 –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교황이나 공의회를 나는 믿지 않습니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인도하는 성서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양심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하고 싶지 않고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위배하여 행동하는 것이 어렵고 불행을 초래하여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이때 황제는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하며 일어서고, 루터가 대강당을 나갈 때 황제는 노여워하는 소리를 내면서 전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와는 달리 엄청난 수의 관중이 환호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기쁨에 찬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나는 관철시켰다!”
루터는 승리를 쟁취했고, 그것은 장차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한 발판이 되었다. 이렇게 루터는 승복당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보름스를 떠났다.

그 다음으로 추기경 알레안더에 의해서 작성된 문서와 함께 그때 그에게 제국의 추방령과 파문을 선고하는 황제의 칙령이 보름스에 내려졌다.

“여러분은 위에 언급한 마르틴 루터에게 집이나 거커를 주지 말고, 먹고 마실 것을 주지 말며,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말이나 행동으로 그를 지지하지 말라. 그에게 그 어떤 도움이나 지지나 원조나 보호하는 행위를 보여 주지 말라. 오히려 여러분은 그가 당도하여 발을 붙여놓는 곳에서 당장 그를 체포하여 잘 감시하여 우리에게 보내라. 여러분은 루터의 모든 추종자, 보호자, 후원자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 즉 그들을 쓰러뜨리고 감금시키고, 주저하지 말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서 소유하고 사용하라. 그렇게 한다면 신앙의 표징이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불의한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교황의 면죄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독일 황제의 서명을 통하여 비호를 받은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폭력을 휘둘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도서출판과 판매의 자유까지도 억압했다.


앞에서 본 대로 탄압 가운데에서도 양심의 심판에 불복할 수 없었던 그의 강한 의지로 종교개혁의 승리는 멈출 줄 모르며 뻣어나갔고 마침내 루터는 절제절명의 위험에 처해 있던 그리스도교를 구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통해서 암흑의 포로에 묶여있던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흑암의 권세에서 이끌어 내셨는지를 루터의 삶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가끔 곤봉을 가지고 때리고 덤벼들며 뇌우와 같이 사나운 성품으로 때로는 풍자와 우화로 몰고 갔던 이 위대한 투쟁자일지라도 어떤 인간에게도 개인적인 적대자로 삼은 적이 없었다. 루터는 누구와 싸우더닞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섬겼던 일 때문에 싸웠던 것이다 라고 친구 멜란히톤이 루터의 장례식때에 관앞에서 낭독한 조사에서 알려졌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불멸의 찬양 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찬송 시는 루터가 개혁자로써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를 알게 해 주면서 우리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강력한 가사와 강력한 멜로디로 개혁의 한 복판에서 그의 활동을 겨냥해서 먹구름이 몰려 왔던 때에 이 찬송을 작곡해서 부르며, 그 먹구름 사이를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1546년 2월17일 조약에 서명하는 날 루터는 일어섰다가, 긴 의자에 누워서 라틴어로 된 성경구절을 불분명하게 암송했다. 만스펠트의 설교자인 쾰리우스, 아우리파베르와 함께 루터의 곁에 있던 유스투스 요나스는 그에게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깨닫고, 루터를 향해서 “존경하는 신부님, 당신은 당신이 설교한 그리스도교와 그 가르침을 언제까지나 지키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며, 루터는 분명히 들릴 수 있는 말로 “예(Ja),”라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에 루터는 오른편으로 돌아 눕더니 잠들어 버렸다. 루터는 약 15분 후에 다시 한 번 숨을 들이쉬고 그의 영혼을 내어 맡겼다.
평생동안 루터가 바라보며 섬겨 왔던 그의 하나님은 적절한 시기에 그를 죽게 했다. 왜냐하면 루터가 죽은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슈말칼텐 전쟁이 발발했고, 루터는 황제의 손에 넘겨져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혼돈된 마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고 무슨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여 이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