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김병구 님의 주장을 잘 읽었습니다. 무수한 댓글과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역시 님의 논지나 주장, 자구적 표현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군요. 님의 관심은 토론이나 대화를 통한 보다 나은 이해나 인식에 도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주장과 관점, 그에 바탕한 어떤 특정한 입장을 선전하고 설파하는 것에 있음을 이로써도 잘 증명해주셨습니다.

님의 지속적인 이러한 태도는 님의 글이나 주장 자체의 권위를 스스로 훼손시키고 있고 님의 글에 대하여 공감은커녕 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적개심과 배척의 정서들만 발전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면서 거듭 절제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계속 반복해서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는 님의 핵심관점을 이번에는(과거에도 수차 반복적으로) 바울과 야고보의 서신을 들면서 피력하셨는데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사안을 님의 관점과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또 다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왜 이렇게 피곤한 작업을 또 반복해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누차에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과 행위는 하나이요 한몸인 것을 우리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은혜와 감격 속에 이미 행위, 성화에 대한 필요 충분한 윤리적 긴장과 의지, 동기가 그 속힘으로 내장되어 있고 성화에의 의지와 힘의 의식, 저변에는 ‘내가 한다’고 하는 자의식이 걸러진 빚진 자의 감격과 의식이 해면 하의 빙산처럼 깔려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행위간 의식과 의지간에 엉켜 있는 유기적 역학관계를 충분히 존중하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 권능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제대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화에의 윤리적 긴장을 뿜어내지 못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단순한 정보나 지식적 동의에 불과한 사이비 거짓 믿음일 것이며, 믿음의 감격으로 빚진 자의 심정을 기초하지 않는 거룩에의 의지와 행위의 노력이 있다면 그 행위는 믿음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 가짜행위이며 ‘자의식’을 대량으로 불러들여 오만과 편견의 탑을 쌓을 수밖에 없는 자연종교적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적이고 평면적인 차원들이 어떻게 복음의 내용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은혜의 원리로 사람을 만나고 치유하고 제자를 세운 일이나 바울이 빛나는 환희로 말하는 믿음의 원리에는 기본적으로 성화의 동력이 내장되어 있고 또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 속에는 인간의 ‘자의식’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믿음의 원리와 그 감격이 당연한 기본으로 깔려 있습니다. 성서신학, 특히 개신교의 구원론은 근본적으로 이런 점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이와 같이 하나이요 유기적 한몸의 차원이므로 바울이 믿음만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 배면에 행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야고보가 믿음의 또 한 면인 행위를 장황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흐름에 대한 충분한 유기적 이해도가 없이 도식적으로 믿음과 행위를 따로 이분법적으로 떼어내어 설정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그분은 성경이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나 한 분인가? 하고 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이신칭의 원리를 인식하고 있고 그 절대은혜를 면도날같이 예리하게 명시하는 그 믿음의 자리에서도 뜨거운 성화에의 동기와 감격을 그 배면에 함께 이해하고 있습니다(칼빈의 견인교리도 결국은 강력한 성화에의 긴장을 포함한다고 하는 것은 전에 저의 “칼빈이 성화필수구원론자라?”라는 글에서 장황하게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다만 이러한 유기적 역학점들을 사람들이 전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너무나도 편하게(?) 기계적으로 이해, ‘믿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는 도식으로 이해, 천박하기 짝이 없는 복음으로 훼손시켜 경험하게 되는 일면은 분명 오늘에 극복되어야 할 사안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이와 같이 하나라고 믿고 이해할 때 김병구 님이 애써 증거해주시는 성화에의 촉구를 강조하는 행위나 그를 밑받침하는 성구도 우리가 충분히 동의하고 존중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가 밑받침되지 않는 믿음의 효력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만큼 ‘그 믿음이 과연 진정한 믿음인가?’ 하는 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도 결국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변화를 최종의 목적으로 한다는 명제의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과 행위가 하나이어서 믿음에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열매로 따라와야 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행위가 따라와야만 한다’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도식화하거나 못을 박듯 믿음과 행위를 한 선에서 동격으로 공식화해버리는 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위험한 설정입니다. 행위를 구원완성의 조건명제로 걸면 구원이 절대 은혜라고 하는 원리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심각한 어려움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발전되면 믿음과 행위의 자리, 전체 구원론은 결국 치명적인 혼란과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이미 전에 수차에 걸쳐 반복적으로 설명 드린 바와 같으므로 다시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신학은 이러한 점을 고려, 칭의와 성화 간 서로 겉으로 모순되고 상반되어 보이는 이러한 면에 대하여 성구들을 구조적이고 입체적인 믿음의식의 시스템적 구조물로 이해 믿음과 성화를 통전적으로 반영시키는 입장을 발전, 심화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반하여 그 어느 누구도 칭의와 성화의 성구를 평면상에 펼쳐놓고 성화를 구원완성의 키포인트로 주목하고 설명하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면적 접근에서는 믿음도 성화도 제 자리를 잃어버리고 전체적으로 기독교가 자연종교의 윤리로 퇴행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을 뒤로하고도 님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성경 본문상에 성화구원완성의 성구가 나와 있으므로 믿음에 대하여 성화가 따로 분리된 채 평행선에 같이 표명된 것으로 이해하시고 반드시 성화를 해야만 영생이 완성된다는 새로운 교리를 설정, 오늘에 이르기까지 맹렬하게 그 관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 의혹스러운 관점으로도 모자라 님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믿음의 검증과 최소한의 대화까지도 완전히 무시하고 급전직하로 선지자적 소명의식을 그 위에 더빙, 자신의 관점만이 성경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접근으로 확신 그 어떤 논객의 충고나 관점에도 귀를 닫고 자신이 어떤 소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른 채 여러 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원론에서 칭의완성이냐? 성화완성이냐? 하는 것은 누가 더 성구를 확실히 인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양면의 성구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배열하고 해석할 것인가? 하는 신학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국면을 무시하고 무턱대고 소종파적인 정열로 성경본문이니 이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정열은 그 과도한 비약만으로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할 텐데 님께서는 그 정열에서 무모하게도 루터나 칼빈까지 부정하고 전체 개신교의 교리를 폄하하고 신학전체를 뒤집으려고 하는 언사를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님의 글을 읽는 모두에게 매우 곤혹스럽고 괴이한 느낌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을 좀 헤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보다 신뢰할 만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6년 03월 29일 15:50:57
뉴스앤조이-김상재목사의"위험한 교리 설파는 자제해야 -김병구 기자회원의 글에 대한 반론"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