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구원관선교회의 자가당착적 모순(矛盾)
-‘성화필수구원론’의 폐해 (2)…성경의 구원관을 왜곡하는 성경해석

중국 초나라 한 병기장사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외쳤다. “자, 내가 가진 이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방패를 꿰뚫는 무기올시다! 그뿐인 줄 아시오? 나의 이 방패로 말하자면, 어떤 창의 공격도 뚫지 못하는 보호 장구요!” 그때 한 사람이 물었다. “그러면, 당신의 창으로 당신의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오?” 병기장수는 유구무언이었다. 사람들은 이 병기장사의 자가당착을 들어 이후로 앞 뒤 안 맞는 말은 “모순(矛盾)”이라 하였다.
근간 <뉴스앤조이>의 장을 빌어, ‘바른구원관선교회’란 거창한 이름으로 ‘성화필수구원론’ 을 선전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글들의 내용이 참으로 <뉴스앤조이>판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많이 듣던 신학적 단어들과 그럴 듯한 내용들이 있어 보이지만, 결국 종합해보면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참으로 모순이다.


자가당착의 모순

김병구 장로는 연속되는 글에서 칼뱅이 ‘오직 믿음’의 칭의론에 집착해서 선행을 이루는 ‘성화’를 이야기하지 않고, 특별히 ‘견인론’ 혹은 ‘구원 보장론’을 주장함으로서 신자의 ‘필수’ 성화로 말미암는 참 구원(영생)의 진리를 도외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칼뱅의 오류를 시정할 참된 개혁주의적 가르침의 원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선행론’(제16장)이라고 주장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모든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의 참된 표준이니 칼뱅의 성도견인론을 ‘포기’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으로 진정 ‘회복’되자고 목청을 높인다.
전편의 글에서, 본인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무학 유치한 발상인지를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논박했다. 우선 칼뱅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함께 신자의 일평생의 성화를 누구보다 더 강조함을 밝혔다(기독교강요 III권,2,6~9). 무엇보다 칼뱅은 견인론은 성경을 근거로 하며 (빌 1:6, 벧후 1:10, 요 10:28~29, 요일 3:9, 욥 17:9), 무엇보다 어거스틴의 견인론을 그 모체로 하고 있으므로, 칼빈의 견인론을 마치 칼빈신학 전체의 오류인 것처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재단하는 잘못임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바른구원관선교회가 그렇게 금과옥조로 여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자체가 제17장에서 ‘성도의 견인’교리를 설파하고 있음을 들어, 김병구 장로가 주장하는 역사적 문제의식과 해결책이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모순인지 밝히고 논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구 장로는 여전히 이에 대한 해명은 전혀 없다. 그는 여전히 ‘칼뱅의 견인론’이 ‘성화’를 이루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견인론’을 믿게 되면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이 늘 것이며, 자신의 가르침만이 지옥불에 떨어질 사람들의 숫자를 줄일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자기 창과 방패를 선전하고픈 마음은 가상하나 기가 막힐 주장이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성도의 견인을 믿었던, 어거스틴과 교회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그리고 칼뱅과 그의 청교도 후예들은 모두 지옥불에 떨어져 지낸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김병구 장로도 웨스트민스터 고백을 따르는 개혁주의자라 자칭하니, 지옥불에 떨어질 운명이지 않은가? 스스로가 던진 창에 자신이 찔리고 있지 않은가?


성경 읽기의 모순

김병구 장로는 자신의 이론이야말로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가르침이라고 강변한다. 그의 성경의 방패는 과연 자신의 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을까? 우선 김병구 장로는 성경에 행함이 없이는 영생이 없음을 가르치는 말씀이 수다하다고 말한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성경은 구원(천국)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또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판단(심판)의 기준은 ‘행위’라고도 말씀하신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무엇보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신원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위의 말씀들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기준이 되고, 영생 또한 진정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행위가 없이는 얻을 수 없음을 선포한다. 자, 이쯤이면 김병구 장로의 ‘필수성화구원론’이 그럴 듯 해보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잠시 성경을 좀 더 살펴보자! 성경은 과연 “영생은 행위로 얻는다”고 명제적으로 가르치는가? 위의 구절들은 명제적으로 “(믿음의 원리와는 다른) 행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기보다는, 참된 믿음의 조건, 혹은 종말론적 심판 기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보인다. 김병구 장로의 말처럼 “칭의는 믿음으로, 영생은 행위(필수성화)로 얻어진다”고 성경이 확실히 선을 긋고 있지를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제적으로 “영생은 믿음과 은혜로 얻는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한이 증거하기를, “이는 저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16) 하였다.
누가는 구원의 역사를 기술하기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고 증거한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증거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 하셨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서 우리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그리스도’ 로 말미암는 구원과 영생을 거의 셀 수 없이 발견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래서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위의 증거 구절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의 원리를 명제적 (믿음-구원, 영생) 으로 분명히 제시한다. 김병구 장로는 자신이 제시한 구절들로, ‘믿음-영생’의 가르침은 틀리고(루터, 칼뱅), ‘행위-영생’의 가르침만이 ‘균형’ 잡힌 성경적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자명하게 “구원과 영생이 믿음과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자기가 읽고 싶은 성경구절만 읽고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못하면 이처럼 문제가 생긴다.
김병구 장로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경의 구원 진리를 오도하는 대로 나아간다. 김병구 장로는 자신이 읽은 성경구절들을 기초로 ‘칭의는 믿음’으로 받지만, ‘영생은 성화’로 받는다고 구분하기에 이른다. 칭의 구원은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받지만, 영생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선행이 결정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위의 제시한 구절들의 가르침은 구원과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선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반면 김병구 장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은 칭의 뿐이요, 영생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서 스스로 성경 말씀을 모순되게 하고 있다.


바른구원관선교회의 분열된 구원관

이전 글에서 그의 '칭의-믿음 구원' '성화-영생 구원' 이론이 갖는 폐해를 세 가지로 지적했다.
우선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반감한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칭의만 이루고 영생에는 소용없다는 말이기에 그렇다. 그리스도는 칭의 신자만 만들고,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의 성화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가 영생에 미치지 못한다는 불경한 주장이다.
둘째로, 그의 이론은 하나님을 영생의 결정자, 혹은 수여자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칭의 받은 신자가 선한 행위를 하는지 못하는지에 따라 웃음 짓거나 한숨짓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영생은 신자 자신의 선한 행위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에게 있어서 영생은 ‘은혜’가 아니다. 은혜란 인간 편에서 아무 일을 하지 않더라도 ‘값없이’ 받는 것이다. 칭의는 은혜가 되지만, 영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노력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은혜가 아닌 것이 된다. 김병구 장로에게 있어서 영생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활동에 의해 도달할 상급일 뿐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는 성경 말씀과 대치된다.
김병구 장로가 칭의와 성화를 모두 이야기 하지만, 칭의와 성화는 그의 이론상 전혀 다른 구원이다. 칭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지만, 성화 구원 (영생)은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다는 분열된 구원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믿음으로 칭의를 받아도, 영생과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도 영생은 없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칭의구원은 진정한 구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균형 잡힌 ‘바른’ 구원관이란 말인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분열시키고, 그리스도 보다 인간의 행위를 높이고, 영생이 공로로 얻어진다는 이교적 가르침의 부활이 아닌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은혜로 영생을 주신다”는 성경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지 않는가? ‘믿음-칭의구원’ ‘행위-영생구원’의 구분은 성경 말씀을 모순되게 만들 뿐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행위로 말미암는 영생’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려는가?” 성경을 모순되게 읽지 않고 어떻게 구원의 통일성(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가르침과 행위의 관계)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칼뱅과 개혁신학의 일관된 구원관

김병구 장로의 분열된 구원관, 모순된 성경해석과는 달리, 칼뱅과 개혁신학의 성경해석은 구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한다.
구원은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결과”라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역사”이다(롬 8장). 구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향한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반영하는 포괄적 언어이다. 거기에는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은, 동일한 은혜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시며, 종말에 있을 심판의 날까지 지켜주시고 보존하시고, 거룩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셔서, 영생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 칼뱅과 개혁신학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칼뱅과 개혁신학에서는 참된 신자들 안에 있는 칭의(믿음)와 성화(행위)를 다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칭의가 있으면 성화의 열매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가 열매를 맺듯이 당연히 맺혀지며, 맺혀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모든 인간을 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의의 하나님(심판주)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거룩한 믿음과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맺는 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게 될(맺혀 질) 열매인 것이다. 열매로서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신앙의 참됨을 증거한다.
또한 생명의 법칙상, 가지가 열매를 맺지만, 뿌리의 진액과 생명력으로 맺혀지므로, 자랑할 것이 없듯이, 우리가 맺는 믿음과 성령의 열매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에게 맺혀져 하나님 앞에 드려질 행위들이지만, 내 것이라 자랑할 수 없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힌 열매이기에 그렇다. 믿음과 행위의 열매는 이렇게 한 근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하고, 믿음 안에서 자라고 열매 맺는다.
그러므로 칼뱅과 개혁신앙은 칭의 구원과 영생 구원을 구분하지 않고, 참 신앙으로(믿음과 그 열매로서) 얻게 되는 한 가지 은혜로서 가르친다. 우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들은 거룩한 행실의 열매로서 그의 믿음과 구원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은혜의 길이 된다.
이러한 성경해석이야말로, 성경을 모순됨 없이 읽고 해석하게 한다. 예를 들어 칼뱅은 성경에 나타난 ‘행위와 관련된 구원(영생)’ 본문은, 결국 참된 믿음의 한 측면(행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일관된 성경 해석의 실례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 21)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대비되고 있다. 여기서 ‘주여 주여’만 말하는 자들은 참 믿음의 사람이 아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왜 행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들은 믿음이 없으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명목상의 크리스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참된 신앙의 진정한 모습은 ‘믿음’(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과 ‘행함’(‘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서의 행함)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둘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한 은혜의 두 측면이다.
참 믿음(순종의 행위로 그 열매를 맺는)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도 능히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베드로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고 권면하고,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고 확인하셨다.
마지막 날에, 선인과 악인 모두가 부활하여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각 사람의 행한 바 그 열매대로 그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신자와 불신자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다른 상태로 서게 될 것이다. 불신자는 그들의 본질대로 진노의 자녀의 행위를 드러낼 것이다. 온갖 악과 불의가 그들이 내놓을 보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였다. 이제 우리가 낼 보고서는, 비록 허물과 연약함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믿음과 성령의 열매로 맺힌 선한 행실들로 채워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맺은 열매이기는 하나,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거하였기에 거둔 열매이기에 은혜이며 선물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를 기뻐 영접하시며, 우리를 통해 맺힌 열매들을 기뻐 받으시고 하늘의 상급으로 영원히 복 주실 것이다. 심지어, 그 때까지 여전히 남은 허물과 부족한 행위까지도,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의 열매로 여겨주실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다른 두 원리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 실체의 두 면이라고 보아야 한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믿음의 행위가 없는 이들을 책망했던 야고보의 경책이나, 믿음과 함께 믿음의 행위를 늘 강조하던 바울의 논리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분은 ‘칭의-믿음’ 과 ‘영생-행위’로 나누어져서는 안 되고, ‘거짓 믿음’(믿는다 하면서 순종함의 행위가 없는 가짜 믿음)과 ‘참된 믿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는)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래서 칼뱅과 개혁신학은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이 ‘거짓’ 인지 ‘참’ 인지를 확인하고자 했고, 거룩함의 행실이 없이는 참 믿음으로 간주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결론: 모순을 제거하려면…

거룩함이 없는 한국교회의 모습에 성화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김병구 장로의 문제제기는 수긍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회의 장로로서, 신학에는 문외한 이지만, 그래도 교회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에, 성경적인 구원관을 밝혀보려는 충정으로 ‘목회/신학’ 란에 꾸준히 글을 올리시는 노력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한두 편의 글도 아니고, 벌써 수년에 걸쳐 문외한이신 분이 칼뱅과 개혁신학에 대해 근거 없이 비판하고 ‘성화필수구원’이라는 모순 가득한 대안 제시로 오히려 건전한 한국교회 개혁신앙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것은 심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몇 가지만 삼가신다면, 그나마 자가당착의 모순은 피하시리라 사료된다.
첫째로, 무분별한 칼뱅 비판을 삼가해주시면 좋겠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나? 또 스스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힘써 따르시는 장로교회 장로가 아니신가? 장로교회 장로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힘써 따르는 것은 잘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칼뱅의 신학을 신실히 따르고 있음을 유념하신다면 무리한 주장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면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무엇보다 칼뱅과 개혁신앙은 장로님이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믿음과 함께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의 좋은 전통이다.
둘째로, ‘오직 믿음’으로 만이 ‘참 성화와 영생의 길’이 있음을 이제 인정하시면 좋겠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의는 항상 ‘걸레’와 같이 더러운 것이 아니겠나? 우리가 어찌 스스로 우리의 죄성을 쳐서 복종시킬 수 있겠나? 어찌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노라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의 권면들은 나의 연약함과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더욱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면하는 것으로 읽혀져야 한다.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은 거치는 돌에 부딪힐 뿐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는 것이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다시 성경 말씀을 대면해보시라!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땅을 거룩한 순례자로 살아가시라! 그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는 바요, 칼뱅이 바라는 바요, 웨스트민스터 신앙인들이 그리던 바요, 이 시대 한국 개신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바요, 무엇보다 장로님과 바른구원관선교회가 진정 가길 원하는 구원의 길이다.

신동수 / 네이퍼빌장로교회 교육목사
Wheaton College Ph. D. Program in Systematic Theology 2006년 02월 27일 14:2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