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는 한 가지 은혜"
칭의와 성화 둘은 별개가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

장로교인이라면,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과 전통이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에 있으며, 개혁자들 중에서도 칼빈의 신학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뭇 이론적인 신학적 주제로부터 실천적인 삶과 개혁의 방식까지 칼빈은 늘 언급되고야 맙니다. 그러나 칼빈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용이나 비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칼빈이 말한 것의 일면을 부각하여 그의 사상 전체를 호도하는 것은 칼빈 당대에 써먹던 반대자들의 수법이었습니다.
특별히 김병구 님이 주장하는 '칭의 구원 완성론'은 칼빈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그런 식의 구원론 또한 그 어떤 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생뚱맞은' 용어입니다. 더 이상 근거 없는 칼빈 이해에 기초한 이러한 편협한 구원론의 유포를 자제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I. 구원의 서정과 칭의
사실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정통 신학자도 칭의 구원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에서 '칭의'는 영원한 '구원의 서정'(The order of salvation)에서 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서정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로마서 8장 29~30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심'의 구원의 과정 혹은 구원의 여러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루시는 구원의 영원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 전의 예지와 예정에서 시작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움이 종착지가 되는 순서 또는 서정입니다. 대표적인 청교도 칼빈주의 학자, 윌리암 퍼킨스는 이 구원의 여정을 '황금사슬'(Golden Chaine)이라 불렀습니다.
칼빈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합니다(<기독교강요> III.21.1~4). 칼빈에게 구원의 결정권과 과정과 성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칼빈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라도 높여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믿음도, 칭의도, 성화도, 영화롭게 됨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위 구절에 의해서도 분명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에 어거스틴에서 칼빈에 이르기까지 정통 신학이 지켜온, '구원의 영원성' '보장' 혹은 '성도의 구원으로의 견인' 교리가 근거합니다. 구원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한번 하나님이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분명 영원한 영광의 구원에 참예하게 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 진정으로 속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멸망하거나 버림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게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기계 전체가 무너진다 해도 구원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지하고 있으며 오직 영원한 지혜가 변하거나 사라져야 이 구원도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기독교강요>, OS 1. 87). 칭의가 우리 구원의 보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과 은혜가 구원의 보장인 것입니다. 칭의이든 성화이든 사람에게 구원의 결정권을 두지 마십시오. 칼빈은 구원의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것을 인간의 무지라고 공박했습니다.
이제 칼빈이 단지 '칭의 구원 완성론'이나 '칭의 구원 보장론'과 같은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구원론 전체를 통해 분명해졌습니다. 칭의는 구원의 특징적인 한 부분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칭의를 포함한 전 구원이 흔들릴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는 이유는 -어거스틴과 개혁자들, 그리고 이후 칼빈주의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기초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II.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두 가지 모습: 칭의와 성화
종교개혁 시대의 어떤 개혁가도 칭의와 성화를 다른 차원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종교개혁의 뿌리로 놓은 마틴 루터까지도, 성화(선한 행위)에 관한한 누구보다 강하게 역설했습니다. 행위에 의한 칭의는 가장 악독한 성경의 왜곡이요 교황주의의 폐해이지만, 의롭다 한 신자들은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던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주석).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더욱 섬세히 다듬어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은혜의 두 측면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지 칭의와 성화를 병립시켜서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식의 논의가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한 은혜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 둘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곧 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III.11.6.).
물론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성화와 칭의를 각각 중요한 장으로 할애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각각의 독특한 구속사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며, 구원의 여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만, 결코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칭의만 있으면 된다"라든지, "성화 없는 칭의는 구원 받지 못한다"라는 식의 논의는 칼빈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어찌 성화의 은혜가 없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과 거룩하심을 은혜로 모두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은혜로 보는 칼빈의 특징 때문에 때로 그의 구원론은 '칭의'보다 '성화'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된 사람은 성화를 통해서 그 은혜의 선택 가운데 있음을 입증(signs-표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하신 선한 일들 (성화의 열매들)은 양자의 영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기독교강요>, III.14.18).
또한 놀라운 것은 칼빈이 '성화'(sanctification)를 '칭의'(justification)보다 앞서(구원론 제일 서두에) 논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후에 칭의를 논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합니다: "… 내가 이렇게 성화(회개, 거듭남, 그리스도인의 삶)를 칭의에 앞서 논의한 이유는 칭의가 선한 행위들(성화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분리되거나 결핍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기독교강요>, III.3.1.).
사실 칼빈만큼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선한 행실 그리고 경건과 사랑에 대해서 신학적, 목회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도 드뭅니다. 칼빈주의에서 네델란드 경건주의와 청교도들이 파생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가장 칼빈주의적인 고백으로 평가를 받고, 실제로 이 고백서의 저자들(Westminster Divines)은 칼빈주의의 예정, 구원론을 강력히 따르던 목회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칼빈 당대에도 개혁가들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로마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는 파', '칭의만 있고 성화가 없는 파' 등으로 매도되었지만, 실상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성경적, 신학적으로 재정립하여 제시한 개혁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을 일방적으로 읽고 매도하고 비방하는 일련의 글은 도무지 자격 없는 이의 글입니다.


III. 몇 가지 고려점들
다시 한번, 어거스틴 이래로 개혁자들과 칼빈(정통 기독교 내에서) 그 누구도 칭의 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얘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여정 중의 한 은혜의 특징적인 두 측면을 보여주는 것뿐이며,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연합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과 섭리를 따라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의 날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닭이냐 달걀이냐식의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 칭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칼빈이 그렇게 안 가르친다고 하니 문제가 많은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받은 칭의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문제를 한번 짚고 마치려 합니다. 칭의와 성화 모두가 은혜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성화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작용하는가? 성화란 죄 없는 거룩함을 말하는데 이 땅에서 죄 없는 완전한 삶이 가능한가? 우리에게 성화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지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생각과 동일합니다. 타락 전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였고, 타락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였지만, 구속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posse non peccare)가 되고, 이후 영화롭게 된 후에는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상태'(non posse peccare)가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칼빈은 칭의 이후,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새로운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할 은혜가 주어졌으며, 원하는 선을 행함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봅니다(<기독교강요>, II.3.10). 성경에 나타난 많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신자들이 능히 기뻐하고 지키고자 노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의 고뇌하는 바울의 모습을 칼빈은 모든 신자의 모습으로 투영합니다.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할 마음과 힘은 생겼지만, 여전히 지체 속에 남아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죄의 소욕에 굴복하는 모습이 우리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루터의 그 유명한 말, '의인이지만 죄인'인 상태가 바로 이런 신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선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시작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없으며,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 성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전히 죄악 된 우리가 성화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나요? 그것은 칭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전가되는 의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허물지고 부족하지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번에는 여전히 허물지고 죄악 된 우리의 행위를 거룩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행위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의 행위까지 의롭고 거룩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결국 칭의와 성화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중의 의(double righteousness of God)인 것입니다.
결국 성화에는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와 새 상태가 감안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죄악 된 옛 삶과는 다른 모습, 즉 좀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웨슬리안 신학은 바로 이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도 완전 성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완성의 날까지는 죄성에 갖힌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여전히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칼빈주의는 이 부분에 주의합니다. 그러함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붙드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진 행위에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셔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행위로 삼아주시고 받아 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다고(성화되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궁극적 완성의 날까지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반복되는 것이며,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첫 부분의 황금 사슬의 동사의 시제를 주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이미 단번에 이루어진 칭의와 영화(성화)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개혁주의(칼빈주의) 구원관이 편협하게 호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칭의와 성화의 뗄 수 없는 은혜를 한국 교회 전체가 누리고 증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열망하지 않고 성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신자는 참 신자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그 공로만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이미 거룩한 자입니다.


2005년 04월 29일 16:58:27
신동수/네이퍼빌장로교회 교육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