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한인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가나안교회 분쟁이 화제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목사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느냐고 안타까워하는 걱정과 이목사의 숨겨진 모습이 표면화 된 것이라는 해석이 엇갈리면서, 이목사가 왜 상식을 벗어나 극단적으로 치닫느냐 하는 지적이 공통적이다. 정상적인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나안교회가 소용돌이로 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목사가 규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과 함께 일을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는 점이다. 큰 지혜를 택하면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죽기 살기로 극단화 시키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 방법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연상시킬 만큼 상식을 뛰어넘고 있다. 이목사가 미국서 30년 이상을 살았는데도, 이목사는 미국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문화와는 담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용삼목사는 가나안이라는 작은 숲에 갇혀서 넓은 하늘과 숲을 못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30년간 오로지 가나안교회와만 씨름하면서 살아 온 이용삼 목사로서는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귀결이자 한계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둘러 싼 나무는 볼 수 있지만, 숲은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우물이나 숲속에 갇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충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 분노하고 반발하게 된다. 숲에 갇힌 사람이 분노하고 반발하면, 숲이 주는 밀폐성 때문에 그 분노와 반발 심리가 더욱 격렬해진다. 더욱이 그 숲이 신앙적인 숲일 때는 모든 것을 합리화 시키고,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신앙의 힘은 위대한 것이지만,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광적인 독소로 변하게 된다. 신앙의 우물 속에 갇히면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이 원망스럽고, 억울함으로 이성의 상실이 급속화 된다. 이런 심리는 자기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증오의 마음을 갖게 되고, 심해지면 저주의 화살을 보내기도 한다.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신앙이 많은 사람이 반대! 자를 더욱 극단적으로 저주하고 혐오하는 것을 가나안교회 분쟁을 통해 목격했다.
비판자에 대한 혐오심리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가 선하고 정의롭게 보이는 색맹 현상을 일으킨다.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은 결사항쟁을 다짐케 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쟁심리를 부채질 한다. 노회를 탈퇴해서 독립교회를 하겠다고 선언한 이용삼 목사로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독려할 것이다. 이목사를 따르는 사람들도 갈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지게 된다. 처음에 머뭇거리고 내키지 않던 마음이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 투쟁 그 자체가 격한 힘을 분출 시키고, 소극적인 사람의 등까지 떠밀어 같은 배의 운명을 타도록 만든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번 그 물살에 휩쓸리면 발을 뺄 수가 없게 된다.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수세로 몰리고 고립감을 느끼기 때문에 결속력이 강해지고 서로를 의지하는 유대감을 신앙이란 고리로 묶게 마련이다.
결국 추종자가 되는 것이다. 지지자에서 추종자가 되면 맹목적이 된다. 자신이 추종하는 사람이 아무리 잘못하고 아무리 잘못된 길을 가도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논리와 힘이 샘솟듯이 솟아오른다. 그래서 역사에는 아무리 잘못된 사교나 컬트에도 목숨을 거는 추종자가 있었고, 지금도 세계 도처에 이러한 추종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줄을 잇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수백명의 생명을 살해한 피플스 템플의 짐 존스 목사 사건이다. 짐 존스 목사가 7백명 가까운 신도들과 집단 자살을 한 세기의 광기를 인간의 상식과 정상적인 상식으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한사람의 미친 목사가 이토록 무서운 범죄를 하늘의 이름과 신앙의 힘으로 자행했었다.
사람들이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은 어떻게 짐 존스 목사 같은 미친 목사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따라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에는 크고 작은 짐 존스가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이렇게 허약하고, 인간의 신앙은 이렇게 독소적인 맹신이 도사리고 있다. 하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것이 인간의 싸움터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중동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자살폭탄을 안고 인간의 시장터로 뛰어들고 있다. 신앙이 맹신 광신으로 변하면 분별력이 상실되고 판단력이 마비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목사인 서이식박사는 이렇게 분별력을 상실하고 맹신적이 되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학대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영적학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성이나 이성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과 기력이 떨어진 나이든 사람들에게 많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이 부족한 선량한 사람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 삶의 뚜렷한 목적이나 가치관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상호의존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이라는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영적 지도자를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은 인간적 관계나 이해 관계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같은 배를 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선택하게 된다. 잘못과 비리에 서로 엉켜있거나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을 때는 추종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조직 폭력배들이 가장 잘 쓰는 숫법이 바로 이 방법이다. 서로가 함께 범죄의 피를 묻힘으로서 발을 뺄 수 없도록 하는 잔인한 방법이다. 가혹하고 잔인한 영적 학대자는 이런! 방법까지 동원해서 추종자를 끌고 간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아직도 이용삼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들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 사람들이 분별력과 이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이들이 반대자나 비판자들에게 보낸 저주와 욕설 편지는 이들이 이미 이목사 추종자가 되어 영적 학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이름을 당당하게 내걸지 못하고 저주와 욕설의 주문을 외운다. 이런 사람들은 햇볕보다는 음지를 택하고, 음울한 어둠 속에서 자기 얼굴을 가리기를 원하는 공통성을 가졌다. 노회가 이용삼목사를 제명 조치하고 그를 따르는 운영위원들을 징계한 마당에 아직도 이목사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병들어 가고,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용삼 목사가 기습적으로 사람들을 모아 노회를 탈퇴한 것을 아직도 두둔하고 거기에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앙이 위험 수위에 오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이 자각 증세가 마비되면 결국 나중에 후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아직도 이용삼 목! 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지뢰밭을 걷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