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사 이야기
1960년대 때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월간 잡지는 장준하 편집장이 발행한 사상계(마치 Time지 같았던) 잡지였습니다. 특히 함석헌 선생의 글은 언제나 유명하였는데 그 중 <주례사> 글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50년 전 말씀이 새삼스러워 여기에 올려 보았습니다.
자기는 많은 결혼식 주례 초대를 받는데 주례사는 한결 같다 .바로 (우화) 썩은 사과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할아버지 할머니 둘이 사이 좋게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말이 한 마리 있었는데 점점 돌보기가 힘들어져서 어느 날 이 말을 장에 내다 팔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말을 끌고 장에 가다가 양을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양이 있으면 매일 젖을 짜 먹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말과 양을 바꾸자고 하였다. 양 가진 사람이 얼른 바꾸어 주었다.
양을 끌고 가던 할아버지는 이번에는 암탉을 안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할아버지는 암탉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따로 돌보지 않아도 매일 달걀을 낳아 줄 테고 아침마다 달걀부침을 만드는 할머니가 아주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양과 암탉을 바꾸었다.
장에 거의 다 온 할아버지는 장 구경이나 하고 가려고 암탉을 안고 가다가 이번에는 썩은 사과 한 자루를 내다 버리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아까운 것을 왜 버리느냐며 암탉과 바꾸자고 하였다. 할머니가 식초 만들려고 썩은 사과를 찾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암탉과 썩은 사과 한 자루를 바꾼 할아버지는 점심 때가 되자 음식점에 들어갔다.
마침 추울 때라 난로가에 앉았는데 난로 불에 썩은 사과 자루에서 쉭쉭 소리가 나며 김이 났다.
마침 신사 한 분이 그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신사는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가 틀림없이 화를 낼 거라고 말하였다.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을 거라 하였다.
신사가 "그럼 내기를 할까요? 할머니가 화를 내지 않으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금화를 다 드리리다." 라고 말했다. 신사와 할아버지가 함께 할아버지 집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말이 양으로 양이 암탉으로 바뀐 이야기를 차례대로 하였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잘하셨구려"를 연발하였다.
이어 암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꾼 이야기를 하자 할머니가 이번에도 "잘하셨구려. 저번에 식초를 만들려고 썩은 사과를 찾았지만 하나도 없었는데 썩은 사과가 이렇게 한 자루나 생겼으니 참 잘되었구려" 하며 기뻐하였다.
신사는 금슬 좋은 노부부를 보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갖고 있던 금화를 다 내놓고 돌아갔다
함석헌 선생은 이것이 주례사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다시금 썩은 사과 우화의 깊은 뜻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여봅니다. 사실 이 우화는 국민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솝 우화인데 저의 중학교 시절 영어교과서에 실려 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야기들 중 왜 이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었을까? 그리고 왜 함석헌 선생의 단골 주례사가 되었을까? 아래의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대답일까요?
1) 마누라는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2) 늙었을 때 횡재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고
3) 욕심 없이 사는 것이 최고 행복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려고
이 이야기는 3번 으로 현실은 물질주의가 지배하지만 가정생활에서는 재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2008년 CNN머니가 미국의 부부 500쌍을 대상으로 '부부싸움을 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 설문조사결과 단연 1위는 돈이라 하였으며 최근 가장 대중적인 한국 찜질 방 여론 조사에서도 부부싸움 원인의 80~90%이상은 돈이 원인이라는 소식입니다.
썩은 사과이야기는 현실(물질)에 눈이 너무 밝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 분명히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마 지금 함석헌선생께서 살아 계시어 주례를 하신다고 하여도 그분은 분명 같은 우화를 신랑 신부에게 주시리라고 믿어집니다. 그분의 한결 같은 가르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장 20절)
함석헌은 ?
(1) : 내가 본 신천 함석헌
김경재 한신대학교 교수
나는 1970년대 초 함석헌 선생이 한국신학대에서 고전 특강을 맡으시면서 그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그분과 절친했던 안병무 교수가 교무과장을, 내가 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분은 지난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사상가의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 민족교육의 성지 오산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서 고민하면서 집필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인이 쓴 최고의 역사서요, 한국인이 총체적으로 자기 민족사를 해석한 역사서인 것이다. 그분의 사상세계 안에서는 종교와 과학이,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이, 역사와 자연이 노동과 예배가, 민초와 하늘이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통해 있는 것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씨알 사상이라는 독특한 생명의 세계가 한국의 정신계 속에 열리게 된 것이다.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종교적으로 직관하고, 시적으로 표현한 그분의 방대한 저작들은 그분이 곧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임을 입증하는 단서인 셈이다.
(2) : 주간조선에서 다음과 같이
(1) : 내가 본 장준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
처음 만난 것은 장준하 형이 1944년 7월 일본 군대를 막 탈출해서 내가 있던 유격대로 왔을 때였다. 나는 3월에 그곳에 먼저 와 있었다. 우리 동지들은 낯선 중국 땅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몸바치기로 하고, 무서운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다 결전의 순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는 조국은, 혼란과 분단의 조국이었다. 장준하 형이 선택한 것은 이 혼란 속에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 그리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사상계 발행이나 직접 정치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온몸으로 자신을 불살랐던 것이다. 투철한 민족자주정신과 기독교적 순교정신으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조국의 제단에 자신의 삶을 바쳤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2) : 주간조선 (아래를 클릭하시면 장준하의 약력이 보입니다)